여행

격포 채석강으로

오주관 2009. 3. 30. 12:26

 

 

  

보리밥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나는 그 반대다. 좋아한다. 덩게떡에 단련이 된 사람들은 보리밥은 입이 놀랄 최상의 음식이다.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오늘도 옥상에서 보리밥을 먹었다. 씹으면 씹을수록 달다. 인생이 이런 맛일 거다.

 

 

 

  

그날 토요일 오후에 출발을 해 도착한 부안. 난생 처음이었다. 격포로 가는 출발지. 안타까운 것은 부안에서 전라도의 거시기를 듣지 못했다. 안 팔려 꾸뎅꾸뎅한 붕어빵을 한 봉지 사 먹었다. 

 

 

 

 

격포. 우선 한바퀴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식당으로 갔다. 충무한식. 1인분에 1만 원. 맛의 총평은 100점 만점에 70점. 동해와 서해의 차이일 것이다. 젓갈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옆지기는 딱딱한 게 껍질 속의 짭조름한 맛을 보기 위해 오도독 오도독 게 껍질을 깨곤 했다. 소주 한병도 한잔으로 끝.

 

 

 

 

가지 수는 많아도 가만히 보면 실속은 없다. 밴댕이 젓은 젓가락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왜 사람들은 많은 반찬에 맥을 못 출까? 4, 5가지라도 충실하면 좋을 텐데. 가지 수만 많으면 장땡인가. 노 땡큐다.

 

 

 

  

호텔인가? 오늘밤 저곳에 잔다고 생각하자. 하지만 정작 잠을 잔 곳은 찜질방.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에 올라가본 산. 팔각정이었다. 바다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위치한 정자. 멀리 위도가 보였다. 

 

 

 

 

추웠다. 그 전날 밤은 겨울 날씨였다. 남쪽인데 추웠다. 격포항에 하나뿐인 찜질방. 코를 고는 게 낙인 한 사내 때문에 온밤을 꼴딱 뜬 눈으로 새웠다. 하! 대책이 무였다. 고강도 본드가 없나? 입술에 착 바르면 숨이 답답해 미친 소 모양 길길이 날뛰며 이 찜질방을 뛰쳐 나가리라. 거시기 씨, 아예 포를 때리소! 드르렁 크르렁! 드르렁 크르렁! 코골이는 분명 병이다. 코골이 환자들은 절대 공공의 장소에 가지도 말고, 끼지도 말아야 한다. 코골이들은 분명 공공의 적이다.

 

 

 

  

공공의 적은 또 있었다. 내 옆의 오십대 초반의 부부. 처음에는 안경을 낀 여자가 말만한 자신의 엉덩이를 바싹 들이밀어 내 몸을 오그라들게 만들더니 나중에는 남편이 자리를 바꾸더니 또 자신의 몸을 찰거무리처럼 내 옆에 밀착을 시키는 게 아닌가. 나는 동성은 싫은데, 하자 옆지기가 웃었다. 밤 10시가 되자 감기약을 먹은 옆지기는 옆에서 코를 골든말든 잠에 빠졌다. 스트로이드제가 들어 있어서 그럴 것이다. 잠시 후 그렇지 않아도 코골이 때문에 잠을 설치고 있는데 안경 신랑이 팔 하나를 내 얼굴에 슬그머니 대는 게 아닌가. 하! 일어났다. 거시기, 와 이래능죠? 거시기 내가 그철 종죠? 내 목소리를 들은 아재는 황급히 몸을 돌린다. 옆에 보니 40센치 정도 여분이 있는데 왜 나에게 바싹 붙나?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런저런 풍경과 열심히 싸우다 아침에 몸을 일으키니 눈알이 5리 정도 들어가 있었다. 코골이를 찾았다. 찜질방 여자 왈, 전날 밤 사연을 듣자마자 나갔다고 한다. 아저씨요, 아저씨 때문에 저 아저씨 밤에 한잠도 못 잤습니다. 미안했겠지. 뭐가 빠지도록 나간 걸 보면. 눈알이 푹 들어간 얼굴로 찜질방을 나온 나는 옆지기와 함께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산 위로 올라갔다.

 

 

 

  

저 건물이 대명콘도. 밤에는 휘황찬란했다. 찜질방과 콘도. 같은 물을 마시고 독을 내뿜는 자와 만 백성을 살리는 자를 팔각정에서 떠올렸다. 그래서 그날 아침은 행복한 미소를 날릴 수 있었다. 대충 감을 잡았을 것이다. 행복의 원천은 내 안에 있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격포항.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LST. 저 군함을 타고 귀신을 때려잡는 청룡부대 사나이들이 월남으로 떠나가곤 했다. 탱크도 싣고 트럭도 싣고 그리고 용감한 해병대 용사들을 실은 엘에스티. 중학교 때 그 배를 자주 보았다.

 

 

 

  

채석강. 7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퇴적층. 마치 책을 쌓아 놓은 듯하다. 남자로 태어나 한 트럭의 책을 읽고 난 다음 땅과 하늘의 이치를 논해야 된다. 한 지게도 안 읽은 맹깔때기들이 지금 세상의 한복판에서 무엇인가를 토해내고 있다. 사람 졸도 할 일이다.

 

 

 

  

그 시절 이 엘에스티를 몬 선장은 대령이었다. 제복이 근사했다. 떠나는 자들과 보내는 자들 모두 엄숙했다. 눈에는 눈물 한 방울이 달려 있었고, 손을 흔들며 보내는 자들은 그들이 반드시 살아 돌아오기를 빌곤 했다. 내 친구들은 거의 해병대 출신이다. 용덕동은 바로 남문 앞 동네다. 들어가고 나오는 정문. 밤 9시면 취침나팔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용덕동 사거리에서 군인들이 패싸움이 벌어졌다. 얻어 터지는 건 후질구레한 타군들이었고, 묵사발을 만드는 자들은 늘 해병들이었다. 팔도에서 모인 건달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충성과 필승의 차이였다.

 

 

 

 

 서해는 어머니다. 언제 보아도 어머니의 품이다. 잔잔하고 고요하다. 동해의 역동적이고 사나운 기질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용서하고 안아주고 그리고 언제까지 기다려주는 우리 어머니의 넉넉한 마음을 닮아 있는 서해.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거시기 전주 막걸리. 택시를 타고 삼청동으로 와서 만난 전주 막걸리. 한 주전자에 막걸리 두 병. 가격은 12000원. 마시고 먹었다. 친구들과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막걸리도 서울보다 맛이 좋았다. 껄죽했다. 기계에서 뽑은 막걸리보다 손 맛이 느껴졌다. 술도가에서 생산한 그 막걸리를 닮아 있었다. 다 못 마시고 나왔다. 워메, 환장하게 배 부른 것!

 

 

 

 

다시 찾은 시외터미널. 전주 덕진이었다. 그곳 동네에 사는 주민 한 사람으로부터 이번 보궐선거에 대해 들었다. 나오지 말아야지요. 대선에서 졌고 그리고 동작에서 진 사람이 나오면 곤란하지요. 우리 지역민들 생각도 같습니다. 전주 덕진을 훑어보았다. 인구 50만의 전주. 전라북도 도청 소재지인 전주는 발전과는 거리가 먼 도시였다. 소도시를 닮아 있는 전주. 양반의 도시요 예향의 도시가 아닌가. 그 품위만큼은 한국에서 뒤처지지 않는다. 이번 격포항을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전라도 기사들의 난폭 운전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탄 버스는 죄다 그러했다. 고쳐야 한다. 여유를 가져야 한다. 양보가 천리 만리를 간다. 팽! 하고 빼봐야 저승길밖에 더 있겠는가.

 

 

 

뒷이야기- 1박 2일의 여행의 마침표는 전주에서 찍었다. 전주 막걸리를 마시기 위해 시외버스 터미널 앞에서 구두를 닦는 아저씨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저씨, 유명한 전주 막걸리 파는 동네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합니까? 우렁찬 목소리로 택시 타고 가면 됩니다. 아주 간단했다. 하! 질문을 한 내가 찐맛이 없었다. 기사들도 대부분 운전을 험악하게 했다. 우리 두 사람의 심장이 얼마만큼 튼튼한지 테스트를 받고 돌아왔다. 전라도와 경상도는 닮은꼴이 있다. 음식이 그 하나다. 대체로 맵고 짜다. 서에는 젓갈이 강세다. 어릴 때 젓갈보다는 꽁치, 오징어, 고래고기, 문어 등등을 먹고 자란 지라 서해의 젓갈 종류에는 많이 약하다. 반면에 옆지기는 너무 좋아한다. 특히 간장게장 종류를 엄청 좋아한다. 여기서 갈린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내가 먹어본 회 중에 가장 맛있었던 회는 꽁치회다. 단연코.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다. 옆지기는 간장게장을 마르고 닳도록 좋아한다. 어쨌거나 전주 막걸리, 푸짐했고 맛이 있었다. 전주 한식, 전주 비빔밥, 전주 콩나물국밥, 전주 막걸리. 전주는 양반의 도시이자 풍류의 도시임이 분명하다. 2009330도노강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