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자서전
여름의 끝이다. 올 여름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다. 폭염의 나날이었다. 이 폭염과 맞설 수 있는 무기. 이열치열이라고 몇 권의 책을 잡았다. 책을 읽으면서 속으로 도지지는 말자. 도지면 사라졌던 집착과 분열이 다시 나를 갉아먹을지도 모른다. 경계의 울타리를 쳐놓고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김대중 자서전이다.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을 나는 큰 기쁨으로 생각했다. 내 생의 후반부에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체적 삶의 역사를 내 눈으로 본다는 그 기쁨은 실로 컸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한가운데에 선 주인공이다. 읽는 내내 내 가슴은 뜨거웠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자주자주 부끄러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는 젊어서는 사업가로 탄탄대로를 달렸고, 정치에 입문을 해서는 자신의 몸을 나라와 국민에게 던진 투사였다. 군사정권의 6년간의 감옥생활에서 그는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변절을 밥 먹 듯 하는 정치꾼들과는 달리 그는 초지일관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꿋꿋하게 싸워나갔다.
우리 현대정치사의 주역들은 김대중의 무엇이었나? 한마디로 그들은 김대중 한 사람을 위해 부역한 들러리에 불과했다. 이 땅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위해 독제세력과 싸울 때 반대의 그들은 독제권력에 달라붙어 자신들의 명예와 부를 위해 하루살이 같은 삶을 살았었다.
무더운 어느 날, 나는 김대중 자서전의 첫 페이지를 열었다.
생의 끄트머리에서
황혼이 찾아왔고 사위는 고요하다.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남기려 한다. 내 삶을 국민에게 고하고, 역사에 바치는 마지막 의식으로 알고 지난 세월을 경건하게 풀어 보겠다. 막상 마지막이라니 후회 없는 삶이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나는 내 일생이 고난에 찼지만 결코 불행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을 성취해서가 아니라 바르게 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기 때문이다.
간혹 왜 정치를 시작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그것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정적들은 나를 ‘용공’으로 몰았다. 또 지역감정이 내 생을 따라다녔다. 벗어나려 몸부림칠수록 수렁 속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나는 수없이 분노하고 좌절했고, 다시 수없이 인내하고 일어섰다. 그들이 부끄러워할 날이 올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생전에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또 어떤가. 우리에게는 모두 공평한 역사가 있지 않은가. 아쉽지만 다시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 지난날들을 펼쳐 보니 모두 아름답다. 나의 자서전은 미래 세상의 주인공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이자 부디 행복하기를 바라는 기도이기도 하다. 백성들이 주인인 세상에서 모두 평화롭기를 빈다.
김대중, 사형
신군부에 의해 반국가 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을 결성하여 그 수괴가 되어 국가 안전을 위협했다는 논고로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죄 등으로 사형을 구형했다.
나에게 최후 진술 차례가 왔다. 나는 실체 없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의 거짓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나는 아마도 사형 판결을 받고 또 틀림없이 처형당하겠지만 내가 처형당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서 이 기회를 빌려 공동 피고 여러분께 유언을 남기고 싶습니다.
내 판단으로 머지않아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 마지막 남은 소망이기도 하고 또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내 마지막 유언입니다.
함께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끝내 옥고를 치른 한완상 교수는 훗날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비록 힘없이 묶여 있는 처지였으나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이미 승리하고 있었다. 그 뜨거운 눈물은 차원 높은 승리의 감동에서 오는 눈물이기도도 했다. 짧은 봄은 지나갔고 긴 겨울이 닥쳐왔으나, 이 긴 겨울 뒤 언젠가는 더 긴 봄이 올 것임을 우리는 이 뜨거운 눈물 속에서 예감하고 있었다.
9월 17일 선거공판이 열렸다. 군 법무관이 판결 이유 요지와 양형 이유를 낭독했다. 이윽고 문응식 재판관이 일어섰다.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도 살고 싶었다. 나는 제발 사형만은 면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법정에서도 속으로 기도했다. 재판장의 입 모양을 뚫어지게 보았다. 입술이 옆으로 찢어지면 사, 사형이었고, 입술이 앞쪽으로 튀어나오면 무, 무기 징역이었다. 입이 나오면 살고, 찢어지면 죽었다.
재판관의 입이 찢어졌다.
“김대중, 사형.”
그의 해박한 지식
조선시대 유교 사회를 정리한 글을 읽고 나는 두 손을 들었다.
조선 왕조는 충효를 나라의 기본으로 삼았다. 백성들도 그것을 공유하고 신봉했다. 충효의 가치를 섬기는 가운데 유능한 인재들을 배출되었다. 그런데 이를 뒤집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다. 세조가 임금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것이다. 신하가 임금을 죽였으니 대역적이었다. 이로써 충이 사라져 버렸다. 또한 세종대왕이 그토록 당신의 손자를 보살펴 달라고 수양대군에게 부탁했으나 그 손자를 사해했으니 이는 큰 불효였다.
비극은 또 다른 비극을 낳았으니, 세조의 역적질은 역사에 무오사화라는 화인을 찍었다. 세조에 의한 유교 윤리 파괴는 이후 조선 왕조 450년을 정신적으로 질식시켰다.
그리고 충효의 현대적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충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흔히 국가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를 충의 대상으로 하면 잘못하면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일본의 군국주의가 될 수 있습니다. 충의 대상은 국민이어야 합니다. 헌법에서도 국민이 주권자입니다. 충의 대상은 바로 내 아내요, 남편이요, 자식이요, 내 이웃입니다. 그래서 충의 대상이 내 곁의 모든 사람이고, 그 사람들이 곧 나의 임금인 것입니다. 과거에는 임금이 주권자였지만 지금은 백성이 임금이요, 주인입니다. 그래서 충을 바르게 하려면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국민을 섬기겠다면서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 청문회장에 나온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는 지난 쌍용차 사태를 잘 막은 것에 긍지와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몽둥이로 진압한 것을 자랑스럽다고 하는 그의 비민주주의적 사고가 바로 이명박 정부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에게 외교는 명줄이나 다름없다. 한반도는 4대국의 이해가 촘촘히 얽혀 있는, 기회이자 위기의 땅이다. 도랑에 든 소가 되어 휘파람을 불며 양쪽의 풀을 뜯어먹을 것이지, 열강의 쇠창살에 갇혀 그들의 먹이로 전락할 것인지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 나라를 책임진 사람들이나 외교관은 누구보다 깨어 있어야 한다.
프랑스의 문명 비평가 자크 아탈리(Jacqes Attali)는 한국은 앞으로 30년 내에 거점국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투자 은행인 골드만삭스는 한국이 앞으로 50년 내, 21세기 중반에는 미국 다음으로 발전하여 국민 1인당 소독이 8만 1000불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독일의 『디 벨트(Die Welt)』지는 앞으로 30년 내에 한국은 독일을 앞서 갈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나는 민주주의, 정의, 평화, 민족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다. 중요의 철학 속에 일관된 인생을 살자고 늘 자신에게 다짐했다. 나는 내게 닥친 다섯 번 죽음의 고비, 6년 동안의 옥중 생활, 수십 년간의 감시와 연금, 망명 생활을 극복했다. 나는 모든 고난의 순간마다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음의 확인이었다. 그래도 어찌 흔들리지 않았겠는가. 내 고난에 동참하여 나를 일으켜 준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이 진정 고맙다.
나는 마지막까지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
저는 민주주의 수호와 대북 화해 정책을 추진하면서 보여 주셨던 김대중 대통령의 용기를 통해 지금도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낍니다. 우리가 더욱 평등하고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신념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빌 클리튼 전 미국 대통령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독제에 항거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용기에 존경을 표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중요하고도 독보적인 사상가로서 민주주의 원칙에 헌신했던 그야말로 특별한 운명을 가진 한 인간이었습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을 통해 위대한 인격을 지닌 가장 비범하고 감동적인 인물을 들여다봅니다. 이 책은 지칠 줄 모르는 용기로 온갖 역경과 시련을 극복하고 나아간 한 사람의 놀라운 인생 역정, 엄청난 좌절, 그리고 경이로운 성공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
뒷이야기- 김대중 자서전을 읽는 내내 나는 극과 극을 오갔다. 지옥과 천당, 남극과 열대, 분노와 부끄러움, 양심과 비양심 등등과의 싸움. 다 읽고 책을 덮었을 때 절망이 물러나면서 빛 하나가 다가왔다. 희망의 빛. 그의 도전정신 그리고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불굴의 열정은 마침내 대한민국을 품격 높은 나라로 만들었다. 나는 간곡하게 부탁한다. 민주주의와 건강한 경제와 남북통일을 원한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아야 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과 장관들, 그리고 여야 의원들 역시 이 책을 읽어보아야 한다. 오늘도 국민을 섬기는 게 아니라 권력을 섬기는데 열을 올리고 있는 부끄러운 친일파 후손들인 조중동과 학계 그리고 이 나라 민주주의의 적인 검찰과 권력기관에 몸을 담고 있는 자들 역시 이 자서전을 읽고 읽어야 한다. 김대중 자서전을 다 읽고 나면 우리는 조금 달라질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대사가 얼마나 질곡의 역사였는지를. 아니, 얼마나 값없고 악랄하고 치졸하고 비민주주의였는지를. 김대중, 그는 민주주의와 자유를 사랑한 21세기의 거목이다.2010820도노강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