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어머니, 95년 소풍을 끝내고 우리 곁을 떠나가다

오주관 2018. 6. 13. 17:04



2018년 6월 9일 저녁 19시 20분,

우리 두 사람은 부산과 포항에서 올라온 누이, 그리고 누님과 형님식구들을 두고

내일 아침에 오겠다고 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왔다.

나와 길을 걷는데 조카로부터 전화가 왔다.

외삼촌, 빨리 올라오세요.

아차 싶어 올라가니 어머니는 이미 숨을 거두시고 난 뒤였다.

그 시간이 19시 25분이라고 했다.

우리 두 사람이 간다고 하고 나가자

어머님이 갑자기 몸을 두 번 정도 크게 떠시고는 숨을 거두었다고 누님이 전했다.



예다함 캐딜락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서울추모공원.

우리에게 전해진 어머니.

따뜻했다.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가 계시는 고향으로 모시기로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있는 그 곳에 묻어드렸다.




아버지가 94세, 어머니가 95세.

두 분 모두 집에서 돌아가셨다.

요양원 신세를 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형님과 형수님 덕분이었다.






어머니와 떨어져 살면서,

내가 한 일은 일주일에 두번 정도 어머니에게 드릴 죽과 찰떡을 사가는 일이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1년 넘는 그 기록을 세울 수 있었던 공은

순전히 죽과 찰떡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죽은 소화가 잘 되고,

찰떡 또한 소화가 잘 되고 그리고 영양가가 있다.

골도 메워주고.

내 용돈으로 어머니에게 드릴 죽과 찰떡을 사 드렸다.

나는 못 먹어도 어머니는 드셔야 한다.

살 때마다, 그리고 어머니가 맛있게 드실 때마다 나는 즐거웠다.

그리고 집을 나올 때

어머니, 어머니가 오래 건강하게 사셔야 제가 일어설 수 있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오야, 그래.

어머니와 나는 늘 하나였다.




어머니는

아마 저 세상에서도 우리 오남매를 지켜보고 계실 것이다.

어머니,

이제 편안하게 아버님과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쉬십시오.

중학교 시절 겨울방학만 되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는 밤이면 밤마다

똥물장군이를 지고 이 공동묘지 우리 보리밭에 뿌리곤 했다.

아버지가 밑에서 중간까지 지고 오면, 어머니가 그 지게를 받아

밭까지 지고 와 똥물을 뿌리곤 했다.

저녁 먹고 시작하면 밤 11시가 넘어야 끝이 난다.

똥물 한 통을 지고 올라가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내 몸은 움츠려들곤 했다.

어머니의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머니,

머지 않아 기쁜 소식을 가지고 아버지와 어미니를 찾아뵙고 보고를 드릴게요.

어머니,

나에게 의지와 열정 그리고 도전정신과 상상력을 물려주신

어머니 당신은 나의 스승이고, 대장이고, 그리고 영웅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리더십이 뛰어난 여걸이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