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위에 올라서면
동네 언덕 위의 집
오늘 아침 집을 나오는데 또 그 새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고 바라보니 비둘기 한 마리가 전깃줄에 앉아 있었다. 저놈인가? ‘구우~ 구우~ 구우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비둘기 소리가?‘ 내 옆지기가 듣고는 ’아니에요.‘ 라고 했다. 아침에만 들리는 것이 아니다. 밤에도 들린다. 집 뒤에 산이 있어 그곳에서 들려오는 건 확실한데 그 소리의 주인공이 어떤 새인지 모르겠다.
며칠 전, 잠자리에 누운 우리 두 사람은 호롱불 밑에서 머릿속에 들어 있는 새를 전부 끄집어냈다.
‘소쪽새?’
‘소쪽~ 소쪽~ 하고 운다.’
아카데미하우스 밑 그 동네에 살 때 소쪽새 소리는 밤마다 많이 들어 보았다.
‘부엉이?’
‘부엉~ 부엉이고.’
‘뻐꾸기?’
‘뻐꾹~ 뻐꾹이다.’
‘그럼 말똥가리일까?’
‘소똥구리는 아니고.’
‘그렇다면 황야의 이리?‘
‘늑대는 아니고?’
경주 불국사 뒤 오지 마을의 폐교된 분교에 살 때, 나는 밤마다 그 소리를 들었었다. 어두운 산에서 우~ 하고 울부짖는 소리. 개소리 비슷했는데 그 아이는 아니라고 했다. 4분의 1 정도 정신이 외출한, 분교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는 그 아이가 어느 날 분교에 찾아왔다. 담배를 한대 얻어피우기 위해 온 것이었다. 담배가 떨어지면 고개를 숙인 채 분교에 오곤 했다. 담배를 주면서 어젯밤 학교 뒷산에서 들려온 들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 아이가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들개가 아이고, 늑대시더, 늑대.‘
‘늑대라고? 임마, 늑대는 없다.’
‘아이시더, 진짜 늑대시더. 저 위에 절이 있는데, 그 절에 지금 아무도 없니더.’
‘와?’
‘늑대 때문에요.’
‘늑대 때문에?’
‘예. 스님들이 오면 며칠 못 있고 다 도망가니더.’
‘와?’
‘밤마다 늑대가 마당에 와가 지키고 있는 바람에요’
‘문 닫고 있으면 되잖아.’
‘오줌이 누러바가 못 견디니더.’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똥은 참으면 약이라고 하지만 오줌은 반대로 병이 된다고 한다. 요강이 떠올랐지만 그만 두었다. 꼴에 자존심이 얼마나 센 지 늘 외통수로 흐르곤 했다. 분교의 유리창을 그 아이가 다 깼다고 했다. 그 이유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그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마음의 문을 좀처럼 열지 않고 지냈던 그 아이의 문을 연 건 나였다. 지성이면 감천인 것이다. 그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대화를 시작하니 서서히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꼬여 있던 실이 풀리 듯 술술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해 추석 전날, 나는 서른이 넘은 그 아이를 데리고 감포 읍내에서 가장 큰 목욕탕에 가 목욕을 했다. 등이 기형인 그 아이는 흡사 노트르담의 꼽추 같았다. 나는 때수건으로 그 아이의 등을 밀어주었다. 사람의 몸에서 그렇게 때가 많이 나올 수 있을까.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세 말 정도 되었다. 등을 다 밀고 그 아이에게 때수건을 건네주었다. 밀었다. 나는 콩죽 같이 땀을 흘리며 밀었는데, 그 아이는 썰렁썰렁이었다.
‘떠갈놈아, 팍팍 좀 밀아라.“
’히히, 아자씨는 때가 없니더.‘
번갈아 가며 다 밀고 나자 입 안에서 단내가 났다. 목욕탕을 나오니 얼굴이 잘 닦인 유리 모양 반들반들했다. 정말이지 때 빼고 광을 내었다. 그 길로 근처에 있는 다방에 들어갔다. 아마 처음이지 싶었다. 기분이 좋은지 입술이 비틀어졌다. 다방 안에 들어온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그 아이 옆자리에 미니스커트 차림의 아가씨가 다가와 앉자 당황해 하는 얼굴에 꽃이 살며시 피어났다.
‘뭐 마실래?’
‘아, 아무꺼나요.’
‘아무꺼나 라는 차는 없다. 이름을 대라.’
미소를 짓는 그 아이의 얼굴이 금방 붉어졌다. 그러면서 자기 옆에 앉아 있는 아가씨를 재빨리 쓱 훔쳐보는 것이었다.
‘아가씨한테 이야기해라.’
‘그냥 커, 커, 커피 마시께요.’
‘내보고 하지 말고 아가씨한테 이야기해라.’
또 얼굴이 붉어졌다. 찔뚝 방망이 같은 뿔뚝성질이 어디로 도망을 갔을까.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마 아랫도리도 일어섰을 것이다. 30년 넘게 그 오지마을에서 수컷으로 살아오면서 얼마나 마음이 설렜고 또 아랫도리가 화가 났을까. 찔뚝 방망이로 통하는 그 아이 얼굴 어디에도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그 마을에 살고 있을까. 아직도 소를 키우며 노총각으로 혼자 살아가고 있을까. 아직도 아무도 몰래 수문 아래로 혼자 기어들어가 그물로 고기라는 고기는 다 잡아 기세등등 집으로 내빼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직도 화가 나면 낫을 든 채 둑 위로 미친듯이 왔다갔다 하며 헐크처럼 우우 하고 울부짖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날 그 이야기를 하면서 한사코 늑대라고 우기는 것이었다. 나는 들개 정도로 이해했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 혹시 늑대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그는 박힌 돌이고 나는 굴러온 돌이 아닌가.
어느 날, 나는 그 늑대를 찾기 위해 하루 종일 온 산을 헤매고 다녔지만 늑대를 만나지 못했다. 늑대는커녕 들개도 만나지 못했다. 내가 만난 것은 꼴때와 노루뿐이었다. 목도 마르고 배도 고파 나는 흙 속에 뿌리를 박고 있는 꼴때를 손으로 파기 시작했다. 흙이 부드러워 한 시간 정도 캐니 뿌리가 드러났다. 대충 흙을 털어낸 나는 꼴때를 쥐고 누웠다. 넉넉했다. 바람소리 새소리 그리고 나뭇잎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꼴때를 베어 문 나는 냠냠 씹었다. 샵싸름했다. 마치 한약을 씹는 그 맛이었다. 하지만 뒤끝은 달달했다. 소태와 단맛이 공존하고 있었다.
인생도, 그 맛인 것이다.
하루가 밤과 낮이듯, 결국 우리네 인생도 반은 어둠이고 반은 낮인 것이다. 쾌락은 고통의 다른 이름이고, 행복은 불행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이다. 우주론적 입장에서 보면 다 같다. 하나다. 고통과 행복이. 해서 지금 당장 내 생활이 지옥 같다고 해서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지금 내 생활이 아방궁 같은 생활이라고 허공에 너털웃음을 날릴 일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길게 살아야 하루살이들인 것이다. 아무리 엿가락 같이 시간이 더디게 간다 하더라도 하루 24시간은 분명 어제와 같은 속도로 지금 가고 있다. 그 시간 속에 행복과 불행이 함께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나에게 가르쳐 준 사람은 안타깝게도 신이 아니었다. 그 진리를 나는 중학교 때 배웠었다. 나의 위대한 스승은 교과서가 아니었다. 선생님도 아니었고. 나에게 인생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스승은, ‘토스또옙스키, 까뮈,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헤르만 헤세, 다자이 오사무’ 등등.
그리고 나는 알았다. 인생은 결국 허무한 존재라는 것을. 불같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결국 나중에 남는 것은 한줌 재뿐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오늘도 자신의 주제와 하나가 되어 거꾸러진다. 섹스도 그 중의 하나다. 강렬한 섹스는 내 존재의 살아 있음이다. 쾌락은 그 다음이다.
알고 나면 인생은 시시해진다. 중간 정도가 가장 좋다. 학구적인 자세로 학문을 쫓아갈 때가 가장 인생의 피크인 것이다. 현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제와 싸울 때, 그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고 황금기인 것이다. 그 위에 올라서면 너무 간단하고 너무 쉬워 에너지가 금방 꺼지고 만다. 그래서 초등학생의 눈높이로 돌아간다. 이렇게.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
뒷이야기- 그 새는 정말 어떤 새일까? ‘구~ 구~ 구우~ 우~ 우~ 우~어~ 어~어’ 하고 단조로 우는 그 새의 이름은? 영자, 아니면 순자? 그 새의 존재를 알지 못하면 미치지……. 세상의 그 어떤 빅 뉴스보다 그 새의 존재가 나를 더 혼란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무슨 새일까? ‘구~ 구~ 구우~’ 밤에 그 새 소리가 들려오면 몸이 오그라들면서 기분이 가라앉는다. 단조는 그래서 슬프다. 2007327북한산아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