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DMZ PROJECT를 소개하면서

오주관 2009. 11. 1. 20:54

 

 

지난 해 5월, 광화문의 청계광장은 밤마다 촛불로 뒤덮였다. 미국산 쇠고기 협상을 지켜본 우리 국민들의 불안과 불만이 마침내 거리로 분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분노 속에는 한반도 대운하도 들어 있었다. 어린 초등학생에서부터 어른들까지 촛불을 들고 청계광장에 모여 하나 된 마음으로 정부와 싸우기 시작했다.

 

6월 10일, 전국적으로 100여 만 명이 모여 촛불집회를 한 그 얼마 후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들의 저항에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그리고 국민들의 뜻이 그러하다면 한반도 대운하는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했다. 국민의 승리였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를 놓고 벌인 공방의 그 끝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어쨌든 지난 해 5월 우리 두 사람도 청계광장에 갔다. 가서 촛불을 들고 합류를 했다. 우리 국민의 건강을 위해 촛불을 들었다. 우리 국민의 주권을 위해 촛불을 들었다. 미국과 벌인 졸속 협상을 규탄하고 저지하기 위해 촛불을 들었다. 한마디로 미국산 쇠고기 협상은 국가와 국가 간의 협상이 아니었다. 굴욕이었다. 지금도 그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때의 내 생각은 안타깝게도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은 뒤였다. 이익과 무한경쟁밖에 없는 한 대기업의 CEO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대못을 박은 뒤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지구와 함께 살아야 할 우리가 경제와 경쟁이 우리 삶을 지탱하는 제 일의 이념이라면 우리의 미래는 절망과 암흑뿐이다.

 

 

 

그 때, 그 곳 청계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면서 나는 의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를 살릴 프로젝트가 대운하밖에 없나? 정말 그것밖에 없나? 고민과 고뇌의 끝에 찾아온 주제. 이왕이면 남한과 북한을 동시에 살릴 프로젝트는 없을까? 양미간을 바짝 좁히면서 고민에 고민을 더해 갔다. 그러던 마지막 날 밤, 그 날도 우리 두 사람은 학원을 마치고 그 곳 청계광장에 나가 힘을 보탰다. 우리 앞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이 엄마와 함께 촛불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했다.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이 세상은 어른들이 보는 세상과 다를 것이다. 단순하게 보이는 그 세상이 답이 아니고 어둡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엄마 손에 이끌려 그 곳 청계광장에 나온 것이다.

 

어른인 내가 부끄러웠다. 촛불을 든 나는 다시 고뇌를 하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채 양미간을 바짝 좁혀 생각하는 로댕이 되어 있는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벼락 치는 소리와 함께 전광석화 같은 빛 하나가 다가왔다.

 

아!

그래, 바로 그것이다!

 

그렇게 해서 찾아온 것이 바로 DMZ PROJECT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DMZ PROJECT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한 달 뒤 모습이 드러났다. 나라와 정치권이 한반도 대운하에 빠져 있는 그 때 나는 한반도 통일에 빠져 미쳐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한반도의 통일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었을 때의 그 벅찬 희열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엔도르핀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실로 행복했다. 한반도가 무력이나 흡수통일이 아닌 평화적 통일. 분명 흥분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 때 그 프로젝트를 지지해준 옆지기가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 날부터 우리 두 사람은 토요일만 되면 설악산으로 가곤 했다. 그 곳 국립공원인 설악산을 오가며 DMZ PROJECT의 그림을 그려 나갔다. 철원에도 두 번 갔다 왔다. 그로부터 일 년 후, 내가 만든 이 프로젝트는 세상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계로도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도 모른다. 짐작만 할뿐이다. 정치권과 학계에서 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지를. 내가 정치권과 접촉한 그 결과에 의하면 그들에게는 당장의 손익이 우선이었다. 나라의 통일문제에 대해서는 내심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 당장 그 사람이 무엇이 되고, 지금 당장 우리가 무엇이 되는지에 신경을 쓸 뿐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학계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은, 그 프로젝트를 완성시키는데 일 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통일 전문가도 아니고 중심부의 정치인도 아니고 통일을 연구하는 정치학 교수도 아닌, 변방의 ‘듣보잡’ 에 불과한 한 아웃사이더가 양미간을 바짝 좁힌 채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에 대해 밑그림을 그렸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통일을 연구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을 리모델링하고 싶어하고, 개조하고 싶어하는 석학들에게 말했다. 한반도 통일에 대해 허리끈을 풀어놓고 대화를 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불러주십시오. 하지만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나에게 일별은 없었다. 그들이 준비가 안 되어 있었나. 어디에 가야 통 큰 수컷을 만나나.

 

침묵. 그리고 함흥차사. 말로는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뜨거운 가슴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정녕 내가 만든 통일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다. 해석불가였다. 아니 해석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정치권과 학계에서 찬밥 신세가 된 DMZ PROJECT는 그러나 아직 숨을 쉬고 있다. 이 프로젝트가 빛을 내기 위해서는 정치권과 만나야 한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그래, 내 자리로 돌아가자.’ 내 자리란 욕망과 이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내 욕망은 여와 야를 떠나 다음 대통령에게 가 있었다. 왜? 그래야 한반도의 통일이 빨라지기 때문에. 그래서 안테나를 세웠고 그 곳으로 날려 보냈다. 뿐만 아니라 학계로도 띄워 보냈다.

 

내 심장은 뜨거웠지만 그들의 심장은 차가웠다.

내 열정은 태양이었지만 그들의 열정은 달빛이었다.

 

후퇴다!

여러 달이 지나갔다. 기다리는 것도 어느 정도였다. 마냥 뒷짐 지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작전상 후퇴다! 라고 퇴각 명령을 내린 나는 응답이 없는 그들에게 결별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메시지에 이렇게 썼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내가 이 프로젝트를 만들 때 얼마나 수고가 많았는지 아느냐. 일 년을 이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내 열정과 인문학적 지식과 상상력을 몽땅 쏟아 부어 만든 이 프로젝트를 받아 보았으면 가타부타 답은 있어야 한다. 그게 인간이다. 그게 도리다. 그 사람을 보좌하고 있는 정치권의 사람과, 그 사람을 외곽에서 보좌하고 있는 교수에게 내 섭섭함을 전하면서 결별을 선언했다. 석학들에게도.

 

이제 남은 한 사람. 물론 그 사람에게도 DMZ PROJECT와 내 서신이 날아갔다. 그러나 그는 지금 땅 밑에 있다. 언젠가는 나올 것이다. 그 때를 기다려 볼 생각이다. 그는 나와 여러모로 닮았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각도가 비슷하다. 만약 그와 손을 잡는다면 이 세상은 분명 신명나는 굿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내 열정과 인문학적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해 만든 이 DMZ PROJECT도 살아 숨을 쉬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여기에 소개한다. 판단은 읽는 여러분의 몫이다.

 

 

뒷이야기-물론 이 프로젝트는 완성작이 아니다. 늘 진화를 꿈꾸고 있고 그리고 진화를 하고 있다. 내가 이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의 핵심 주제는 상생과 화해 그리고 평화적 통일이었다. 누구 좋아라고 무력을 사용하며 흡수통일을 한단 말인가. 마음이 가지 않은 몸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남한과 북한도 마찬가지다. 마음을 여는 과정이 중요하다.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면서 남한과 북한은 마음의 문을 열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해하고 신뢰하고 믿음으로. 이 DMZ PROJECT의 끝을 나는 모른다. 어쩌면 시작일지 모른다. 내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1.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대전환이 와야 한다. 2. 이념은 아니다, 라는 것에 합의를 해야 한다 3. 22세기적 마인드를 가지고 접근을 해야 한다 3. 오늘보다는 먼 훗날을 생각해야 한다. 20091014도노강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