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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을 보내면서

오주관 2018. 12. 31. 10:57

  



Goodbye, 2018


이제 내일이면 이 해 2018년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2019년 기해년 황금돼지해가 다가온다. 내일이면 사라지는 이 해의 마무리를 어디에 가서 해야 하나?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산으로 갈 것이고, 바다가 좋은 사람은 바다로 갈 것이고, 강이 좋은 사람은 강으로 갈 것이다. 나는 어디로 가 2018년 이 해를 마무리를 하나? 대구에 있는 갓바위도 가고 싶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에도 가고 싶다.


파괴는 창조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읽은 세계문학 중에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나는 그 소설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빠져 들어갔다. 내 정신세계와 너무 닮아 있었다. 그 때의 그 떨림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나?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의 성장소설이다. 그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말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곧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가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이다.”

 


頓悟頓修頓悟漸修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그 다음으로 내 머릿속을 깬 것은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이다. 물론 돈오점수도 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전자인 돈오돈수는 탁, 하고 박이 터지는 순간 깨닫는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돈오점수는 깨닫고 나서도 계속 수행이 필요하다. 전자는 학력별무이고, 후자는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길고 긴 수행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새와 돈오돈수가 가리키는 대상은 이 세상이고, 나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과 내가 무엇이고 누구인지의 답을 찾는 것이다.

 

전자의 알은 하나의 세계이고, 그 세계를 깨고 나와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와 나라는 존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돈오돈수 역시 그 방법은 달라도 이 세계와 내가 누구인지를 찾는 구도의 세계이다.

 

이 지구는 누가 만들었고, 우리 인간은 어디에서 왔나?

 

45억 지구의 역사를 놓고 우리는 종종 의문에 휩싸일 때가 많다. 과연 이 지구를 만든 이는 누구이며, 그리고 우리 인간은 누가 만들었나? 창조이냐 진화이냐? 기독교인들은 하늘이 무너져도 하느님과 창조설을 믿고 있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지동설을 설파한 갈릴레오는 죽어가면서도 중얼거렸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하느님과 천동설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과학자인 갈릴레오는 기독교를 말아먹은 역적 중에 역적이었다. 나는 묻는다.

 

누가 나에게 신이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을 해보이면,

반대로, 나는 신이 없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보이겠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교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66년 삶의 주제

 

삶과 죽음

부와 불평등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일군 오천면 용덕동 4반 반장님의 32남 중 셋째로 나는 태어났다. 귀신도 때려잡는 해병 1사단의 관문인 용덕동. 내 나이 4, 5살 때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이 돌아가셨다. 그 할아버지는 가끔씩 망태기를 등에 진 채 동네를 다니시면서 소똥을 주우시곤 했다. 나는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인사를 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항상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시며

 

그래 그래. 니는 인사도 잘 하네. 아이고, 착해라.’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었다상여를 어머니와 함께 지켜보면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게 뭐예요? 어머님이 그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사람이 죽으면 관에 넣어 저렇게 상여를 차려 장사를 지낸다. 어머니의 그 말을 듣고 나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사람이 죽는다고? 그 때까지 나는 사람은 안 죽는 줄 알고 있었다.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줄 알고 있었다.

 

사람이 죽는다! 그렇다면 어머니도 죽는다. 아버지도 죽고, 우리 5남매도, 그리고 나도 죽는다. 공포 그 자체였다. 그 때 그 할아버지의 상여를 보면서 내 머릿속에 삶과 죽음이라는 단어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삶과 죽음이 내가 풀어야 할 하나의 세계였다그 때부터 나는 생각하는 로댕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들어가 본 우리 동네는 이해가 안 되었다. 부조리의 세상이었다. 부자도 있고, 한 끼 밥을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냥 아무런 불평 없이 뒤섞여 살아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세계문학을 접하다

 

삶과 죽음, 그리고 부조리한 세상이라는 주제에 기름을 끼얹은 것은 누나가 서울에서 사가지고 온 다이제스트 세계문학이었다. 두 개의 작은 박스 안에 세계문학이 다 들어 있었다. 한 박스에 작은 책 7권이 들어가 있었다. 이칠은 14. 내 초등학교는 그 두 박스의 세계문학이 전부였다. 세계문학 속의 세상은 너무 신비했고, 두려웠다. 나에게 감당할 수 없는 꿈와 희망을 선사했고, 고통과 지옥을 보여주었다.

 

세계문학 밖의 우리 동네의문투성이가 내 머리를 돌게 만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왜 공무원과 군인가족들은 흰쌀밥을 먹는데,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밥을 먹지 못하고 굶을까? 보릿고개가 있던 배고픈 시절이었다. 우리 동네에 농사를 짓는 집은 굶는 게 다반사였다. 학교에 도시락을 싸 가지고 오는 친구는 공무원과 군인가족들이었다. 나머지는 대부분 점심을 굶었다. 아버지가 전기 기술자이면서 농사를 짓고 있었던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쉬는 날도 없이 죽을 힘을 다해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밥을 먹기 어려웠다. 그 때 우리 가족이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은 쌀이 아니라 보리쌀과 조, 그리고 나물과 해초들이었다. 숟가락으로 밥을 떠면 흩어지는 매조는 지금도 좋아하지 않는다. 묽은 국물 속에는 고기 대신 시래기와 해초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지금도 시래기를 엄청 좋아한다. 아마도 어린 시절 너무 많이 먹은 그 후유증?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먹을 때는 고통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 같이 건강식이었다. 내 건강의 근원은 용덕동의 가난이었다.  

 

그 주제를 끌어안고 산 지난 한평생

 

삶과 죽음

 

지금 이 날까지 살면서 그 주제에서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이 되었다. 무릇 생명체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면 서쪽으로 해가 진다는 것을 받아들이듯이. 그렇다면 남는 건, 하나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개차반으로 살아야 하나, 사기꾼으로 살아야 하나, 아니면 도둑놈으로 살아야 하나? 떠오른 단어는 결국 가치였다. 가치 있는 삶이었다. 그리고 결론은

 

1인칭 삶이 아닌 3인칭 삶이었다.

 

우리가 경계해야 될 것은 주의이다그 주의를 뛰어넘어야 한다. 공산주의, 자본주의를!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를 전주비빔밥처럼 비벼 새로운 주의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도서관으로 출가를 하다

 

어쨌든 나의 두 번째 주제인 부와 불평등이라는 가당찮은 그 주제를 풀기 위해 나는 출가 대신 도서관에 내 존재를 묻기 시작했다. 도서관은 나만의 무문관이었다. 그래, 끝까지 가보자!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답이 보일 것이다.

 

40 그 언저리에 드디어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와 불평등이 어디에서 출발을 했고, 어떻게 발전해왔는지의 그 과정들을 보았다. 그리고 상극인 부와 불평등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그 답이 내 레이더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구의 역사와 발전단계가 과학이라면, 우리 인간의 역사와 발전단계는 너무 엉터리였다. 우리 인간은 똑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바보들이었다. 그런데 그 똑똑한 편에 속하는 그들이 지금까지 보인 그 솜씨가 소름끼치게 만들었다. 그들이 만든 그들만의 카르텔. 그 공식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어느 집단도, 함부로 깰 수 없는 그들 1%만의 세상이었다.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그들 1%가 만든 아방궁의 다른 이름은 바로, 자본이다.

 

이 해의 끝을 어디서 보낼 것인지를 놓고 고민을 하다 다른 길로 빠져버렸다. 이 연말을 서울에서 보낼 것인지, 대구 갓바위에서 보낼 것인지, 아니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으로 내려갈 것인지를 이제 생각해야 한다.

 

P.S-나는 살아오면서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골고루 맛 보았다이곳 페이스북에서도 그랬다. 오는 사람은 두 손을 들고 환영을 해주었고, 안 오는 사람들도 기꺼이 페친이라는 그 이름으로 찾아가 용기와 격려를 아낌없이 주었다. 나라는 사람은 되로 받으면 섬으로 갚는 사람이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게 더 행복하다. 악담보다, 덕담이 좋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지금 나쁜 자본주의와 싸우고 있다. 내 마지막 화두는 나쁜 자본주의에 착한 자본주의를 집어넣어 이 세상을 살리는 일이다. 충분히 살릴 수 있다. 이 세계의 문명사를 바꾼 사람들 중에 두 사람.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사람이고, 스티브 잡스는 하드웨어를 만들어 우리 인간의 문명사에 한 획을 그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세계부자 랭킹 5위 안에 든다. 이 세계 젊은이들이 본받아야 할 멘토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빌 게이츠는 자신의 부 99%를 이 사회에 환원을 시켰고, 스티브 잡스는 한 푼도 이 사회에 환원을 시키지 않았다. 우리 젊은이들은 그 두 사람에게 존재와 삶의 자세를 배우면 된다. 끝으로 한마디만 더 붙이면.

 

앎의 궁극은 실천이다


블로거와 페친 여러분, 하루 남은 2018년 이 해를 잘 마무리 하시고, 새로운 해인 2019년 황금돼지해에는 건강하시고, 소원성취하시고, 그리고 돈을 많이 벌어 가난한 이웃을 돕는데 땀을 흘리는 한 해가 되시기를 멀리서나마 기원합니다.

                                                                                                                  2018, 12, 31, 도서관에서 오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