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배낭 하나를 메고 인천에 도착한 나는 이곳에 둥지를 텄다.
하인천역에서 내려 자유공원으로 오르는 입구에 있었던 신경향 여인숙.
2층 목조였고 일본식 건물이었다.
건물이 낡아 퀴퀴한 냄새가 진동을 했고, 목조라 난방이 안 되는 곳이었다.
월 15만 원으로 둥지를 턴 나는 이곳에서 여름 한 철을 보낸다.
기억이 새로운 것은 밤에 자다 배 위에 무엇이 스물스물거리면 십중팔구 바퀴벌레였다.
그리고 조바인 칠십이 넘은 할머니가 가끔씩 정신을 놓을 때마다 벌컥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혼비백산하길 여러 번.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자 추웠다.
특히 새벽에는 오한이 들 정도로 한기가 닥쳤다.
도망가자.
도망을 가야 할 것이, 목조라 난방이 안 되다 보니 이곳에 둥지를 튼 사람들이 대부분 전기장판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내 눈에 그것이 수상해보였다.
낡은 2층 일본식 건물.
언제 과부하가 걸려 불이 날지 모를 일.
바베큐가 되기 전에 이곳을 탈출하자.
9월 말, 신경향여인숙을 나온 나는 동인천역 앞 고시원에 둥지를 옮긴다.
그리고 그해 12월, 신경향여인숙이 불이 나 8명인가 9명이 불에 타 희생을 당한다.
대부분 중국에서 온 동포였다.
나도 얼굴을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 앞집에 살았던 노가다에 의하면, 내 방에 있던 남자가 쇠창살에 기댄 채 '아, 뜨거워! 아, 뜨거워!' 하며 화마 속으로 사라졌다고 했다.
새벽이면 이곳에 나와 일터로 가는 버스를 탄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이곳에 도착하면 일거리를 잡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버스에 오르느냐 안 오르느냐, 는 총무 손에 달려 있다.
눈에 잘 보이면 타고 눈 밖에 나면 못 탄다.
버스 주위에 서 있으면 중앙인력의 총무이기도 하고 부장으로 통하는 이 부장이 '형님, 타소.' 한다.
일거리가 없어 백 명 중 50명을 뽑아야 할 때도 '형님, 타소.' 하며 나를 대우해주곤 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두 사람이 기억에 남는다.
인천 동성고등학교를 나온 채형과 중국에서 온 이 씨 형님.
특히 채 씨와는 영종도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혈맹의 동지였다.
1년 동안 우리 두 사람은 붙어 다니며 12월의 영종도 칼바람을 맞았고, 7, 8월의 폭염과 싸웠다.
그해 여름, 우리 두 사람은 하루에 벽돌을 3000장씩 옮겼다.
다른 사람 같으면 하루에 벽돌을 1000장 옮기면 땡이었다.
순전히 내 오기가 발동이 되어 그렇게 비지땀을 흘린 것이었다.
일주일 뒤, 채형은 뿔이 났다.
그가 누구인가?
사우디, 싱가폴, 리비아까지 갔다온 그 방면에서는 베트랑이었다.
일주일을 순전히 나 때문에 비지땀을 흘리며 벽돌을 옮긴 채 씨 결국 나자빠졌다.
'오형, 우리 일당이 오만 원입니다. 그러니 오만 원어치만 옮겨줍시다. 우리가 옮긴 게 얼마짜리인지 아십니까? 십오만 원어치입니다. 이렇게 옮기면 골병밖에 안 듭니다.'
그때의 나는 5만 원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학 그 끝에 오는 희열을 즐긴 것이었다.
언제인가, 점심을 마치고 풀밭에 누워 담배를 태우며 채형이 '오형.' '예.' '만약, 오형이 인천시장에 당선되면 나를 어느 자리에 앉힐래요?'
'에 또, 동구청 청소과장.'
'예? 겨우 청소과장이요.'
'아, 청소과장이 얼마나 중요한 직책인데... 그럼 비서실장할래요?'
'안 됩니까?'
'아, 그럼 비서실장하소.'
'하하하.'
'하나 명심할 일은, 돈이 좀 있다 싶으면 나에게 붙이고 돈이 없다 싶으면 빠꾸시키소.'
'흐흐흐.'
'그렇게 훑쳐 먹으면 임기 석 달도 안돼 우리 두 사람 다 감빵가겠지요.'
'하하하!'
전기면 전기, 목수 일이면 목수, 못하는 게 없었다.
.채형, 생각납니까? 한국은행 그 현장.'
현장에 도착하자 무대가리 같이 생긴 현장소장이 우왁조로 우리 두 사람을 현장에 데리고 갔다.
현장을 본 채 형, 기겁을 했다.
무대가리가 잠시 자리를 비우자 채형이 내 소매를 끌었다.
'오형, 빨리 나갑시다.'
'와요?'
뜯겨진 벽면을 가르켰다.
'저게 석면입니다.'
'석면요?'
'예, 저거 마시면 우리 폐암에 걸려 골로갑니다.'
'아이고, 무새라. 골로가면 안 되지, 나갑시다.'
'개새끼!'
'진짜 개새끼네!'
바람처럼 빠져 나온 우리 두 사람이 간 곳은 자유공원 밑 밴댕이 회집이엇다.
그곳에서 소주 두 병을 비우며 그날 오전을 보냈다.
잠시 후 이부장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전화를 받은 채형이 능청스럽게 뭐라고 뭐라고 웅얼웅얼거리더니 뜬금없이
'거시기, 오형이 가자고 해서 나왔습니다.' 라고
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었다.
이런 동태눈깔을 보았나!
이부장과 나 사이를 믿고 임시방편으로 풍을 때린 것이었다.
그 채형이 아직도 내 뇌리에 남아 있다.
영종도 블루스의 주인공인 채형, 건강하십시오.
언젠가 만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채형과 내가 인천에 건설한 건물은, 인천 영종도의 오피스텔 두 곳, 상가 한 곳, 아파트 한 동, 그리고 인천공항 신활주로.
이곳 공항을 내가 건설했다.
채형과 함께.
뻘구덩이에 발이 빠져 애를 먹었다.
그리고 작열하는 태양.
태양을 피할 곳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기초작업부터 내 땀이 배어 있는 인천국제공항.
유명한 대림건설.
공항 옆 공항 철도역 공사장.
그곳 대림건설의 현장은 물을 주지 않았다.
삼성과 엘지와 대우와 풍림은 시원한 생수를 현장 곳곳에 배치를 해 뜨거운 태양에 시달린 노동자들의 갈증을 다스리게 했는데,
이 망할놈의
대림건설은 무슨 배짱인지는 몰라도 현장에 마실 물이 없었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보아도 마실 물은 보이지 않았다.
입이 쩍 말라붙었다.
정신이 가물가물거렸다.
아침에 일을 나올 때 물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었다.
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림의 대가리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때 그 현장에 있었으면 아마 황천행 버스를 탔을 것이다.
정말이지 질이 낮은 형편없는 회사였다.
하인천의 신경향여인숙에서 동인천역 앞 고시원으로 옮긴 곳.
4층이 고시원이었다.
출입구에서 가까운 방을 택했다.
여차하면 연기 속에서도 빠져 나올 수 있게.
개죽음은 피해야 한다.
비가 오거나 폭설이 내려 일을 나가지 못하면 늘 찾곤 했던 인천시립도서관.
전망은 좋아도 좀 추웠다.
해서 화진도서관에 많이 다녔다.
그곳은 따뜻했고, 시원했다.
비록 신분은 노가다였지만 그래도 일이 없는 날에는 책을 끼고 살았다.
책밖에 더 있나.
책은 나에게 있어 미지로 갈 수 있는 탈출구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또스또엡스키, 베토벤, 모차르트, 체 게바라, 존 레논, 파울로 코엘료.
그들과 만나기 위해서는 도서관과 책뿐이었다.
인천시립도서관에서 바라본 인천내항.
인천은 운문이 아닌 산문이다.
구석구석이 이야기 밭이다.
인천은 그리고 항구다.
잘 캐면 여기저기서 밀수품이 나올 것 같은 도시이기도 하다.
마약 냄새도 많이 나고.
그리고 마도로스와 술집 작부의 애달픈 사랑도 있다.
어쨌든 인천은 항구도시요 산문의 도시다.
내가 가장 가고 싶었던 커피숍.
하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한잔에 비싸야 3000원 그 선일 텐데, 그러나 나는 저곳을 가지 못했다.
그 분풀이로 저 집 위의 자유공원에 있는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가 늘 내 몫이었다.
망할!
볼 때마다 나를 유혹한 에스프레소 레스토랑.
언제 한번 시간이 나면 옆지기와 가보고 싶다.
가서 바다를 바라보며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실 것이다.
자유공원.
여름에 일을 마치고 돌아와 중국식당이나 신포시장에 있는 한식집에서 밥을 먹고 오는 곳.
이곳에 와서 철책 아래 벤치에 앉으면 터져 나오는 소리.
'아이고, 시원타!"
'아이고, 시원타!'
불어오는 바람이 말도 못하게 시원했다.
모기도 없고.
한 시간, 두 시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곳 자유공원에서 더위를 물리치곤 했다.
그곳은 좋은 곳이다.
절로 노래가 나오는 인천에서의 내 쉼터.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인천항.
건너편에 월미도도 보인다.
그 흔한 회 한 점 못 먹었다.
채형과 먹은 밴댕이 회가 전부였다.
니 맛도 내 맛도 없었다.
서해쪽 사람들은 좋아했다.
나는 노! 였다.
자유공원 밑에 있는 차이나타운.
자금성과 풍미인가 하는 식당을 자주 갔었다.
우리 사람, 짜장면 좋아해!
나도 좋아해!
이곳은 인천학생문화회관인데, 내가 지었다.
기초부터 완공 그 단계까지.
이 씨 형님과 이곳에서 일을 많이 했다.
먼지도 먹을 만큼 마셨다.
노가다 인생이 그런 것이 아닌가.
일을 마치고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고시원에 와 몸을 씻는다.
옷을 갈아입고 식당에 가 저녁을 먹고 나면 달려가는 곳.
학생문화회관건물 뒤 예총회관.
그곳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옆지기.
'거시기, 우알우알우알' 하고 주깨다 보면 언제 카드가 먹통이 되는지 모른다.
우알우알이 엄청 나에게 힘을 준다.
그 힘을 믿고 숙소로 돌아오면 그때부터 잠 속으로 잠수를 한다.
푸욱!
가라앉으면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사요나라다.
동인천역.
오고 가는 곳.
이별과 만남이 있는 곳.
어제 인천을 찾은 나는 화평동 냉면을 먹지 못하고 돌아왔다.
나는 여름 한철 냉면만 먹고 살았으면 할 정도로 냉면과 궁합이 여러모로 맞았다.
자유공원으로 오르다 보면 삼거리를 만난다.
그곳 화평냉면집이 내 단골이었다.
한 그릇을 비우면 주인 아주머니가 '더 드릴까요?'
'예, 좀 더 주소.'
질이 문제가 아니라 양이 문제이든 그 시절의 나는 똥걸비였다.
많으면 얼굴이 피고, 양이 적으면 도둑놈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냉면은 나의 영원한 먹거리.
뒷이야기- 바닥을 쳤다. 아니면 바닥까지 내려갔다. 그 다음은 비상. 내 지난 삶은 늘 바닥이었다. 한번도 양지쪽에 끼지를 못했다. 영원한 아웃사이더였다. 고등학교만 나와도 양복 입고 에어컨 나오는 곳에서 돈을 벌기를 원한다. 겨울이면 난방이 잘 된 사무실에 앉아 뜨뜻한 바람을 쬐며 시간을 다스리는 그들을 볼 때마다 신기해 했다. 하지만 한번도 바닥 인생을 후회하거나 절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운명이라 생각하고 받아 들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러시아의 대문호 또스또옙스키를 떠올렸다. 신은 왜 나에게 이토록 무거운 짐을 지게 하실까? 하면서 괴로워하다 얻은 답은, 아마도 나에게 큰 사명감을 주시려고 이토록 무거운 짐을 주시는 모양이다. 그 말을 나는 믿는다. 한평생 참을 구해온 나의 끝이 궁금하다. 나도. 20081219도노강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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