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남대문시장에서 전복죽과 호박죽을 사다
1월 20일 토요일 아침, 옆지기는 동대문역사역에서 내렸고 나는 회현역에서 내렸다. 지난 17일 수요일, 우체국에서 국제우편(EMS)으로 내 프로그램 하나를 일본으로 보냈다. 7개월 작업 끝에 드디어 완성을 본 것이다. 이제 남은 네 개도 화요일이면 편지번역이 끝난다. 그럼 옆지기와 최종점검을 한 후 늦어도 다음 주 월요일이면 미국으로 날아갈 것이다.
며칠 전 제본을 마친 나는 신촌 이대 그 거리에서 종로1가의 영풍문고까지 걸었다. 미세먼지가 없는 날이면 나는 무조건 걷는다. 걸으면 행복한 나,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JTBC 비정상회담에 나가 한 번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 프로그램이 작년에 막을 내렸다.
중림동역에 내려가 출구를 찾아 올라가는데 이런 일이 있나, 웬 50대 후반의 키 작은 여자 하나가 바지와 팬티를 벗은 채 미소를 지으며 망부석이 되어 서 있었다. 그 옛날에도 저와 비슷한 광경을 한번 본 기억이 있다. 이 추운 겨울, 자신의 바지와 속옷까지 벗은 채 서 있는 저 여자의 정신세계를 그 누가 알까? 나무간셈보살,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나는 서둘러 역을 올라왔다. 그 건물의 1층에 있었던 꽤 큰 중국식당은 사라지고 없었다. 시간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 건물을 지나 걸어가다 어, 하고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중림동에서 옛날의 우리 역사를 발견하다
중림동의 다운타운 그 자리에 우리가 했던 영어학원이 그대로 있었다. 간판도 우리가 사용하던 그 간판이었다. 영어학원, 수학학원, 국어학원,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그리고 1층의 또 다른 영어학원이 그대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도곡, 중림, 도봉, 상계. 그 네 곳 중 중림동이 전성기였다. 학원은 목이다. 실력이 출중해도 가난한 동네에서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그 때의 우리 영어학원은 아이들이 너무 많아 알바생을 세 명이나 두고 운영을 했다. 너무 잘 되어도 문제가 따랐다. 옆지기의 몸이 급속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하드웨어가 튼튼하지 않으면 소프트웨어가 고장이 나게 마련이다. 접는 수밖에. 그 해 다른 사람에게 학원을 넘겼다.
학교도 그렇고, 학원도 이제 좋은 직장은 아니다. 시대가, 사악한 자본이 사람들의 성정을 면도칼로 만들어버렸다. 옛날의 맥주 한 병에 땅콩 한 봉지에 미소를 띤 그 선생들이 아니다. 옛날의 하늘천 따지를 배우던 서당의 그 학생들이 아니다. 자본이 대가족제도를 허물어뜨렸고, 핵가족이 되면서부터 우리 인간들의 정신세계가 망가지기 시작했다. 대가 아닌 소에 우리는 이제 목숨을 건다. 사소한 문제에도 신경은 팽팽하게 당겨져 오고, 그러다 임계점과 한계를 넘었다 싶으면 공과 사, 그리고 스승과 제자의 그 선도 쉽게 무너져버리곤 한다. 제자에게 얻어맞는 선생, 선생을 놀려먹는 제자들, 성적희롱의 대상이 되어 있는 우리 선생들. 그래서 언젠가부터 선생이라는 직업은 3D 업종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어깨를 펴고 숨을 쉴 수 있는 건 대학교 교수뿐이다. 학원도 마찬가지다. 시장바닥이다. 중, 상 정도만 오면 그래도 어느 정도 케어가 되는데, 그 밑이면 난장도 그런 난장이 없다. 열이면 두 학생 정도는 정신이 A급이고, 나머지 6, 7명은 F급인 함량미달이다. 몸과 정신이 따로 노는 기차화통들을 데리고 공부를 시킬라치면 아침에 집을 나올 때의 그 맑은 정신과 몸이 저녁이 되면 기진맥진 다 빠져 나가버린다. 순간순간 마, 이, 이, 하고,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래, 이러면 안 되지, 하고 내려올 때가 하루에 여러 수십 번이다.
남대문시장에서 죽집을 보다
서울역을 거쳐 남대문시장을 지나면서 본 죽집. 전복죽, 호박죽, 그리고 팥죽을 끓여 파는 식당이 있었다. 작을소가 3500원이고 큰대가 5000원이었다. 어머니에게 사 드리면 되겠다. 지난 주 토요일 동네 죽집에서 산 쇠고기버섯죽과 찰떡을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죽을 조금 드시고 숟가락을 놓으면서 야야, 이제 죽이 싫다, 라고 했다. 너무 오래 드신 거였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 계속 틀면 소음이다. 이제 레퍼토리를 바꿀 때가 온 것이다.
남대문시장에서 산 호박죽과 전복죽, 성공이었다. 맛이 있다고 했다. 마침 이사문제 때문에 와 있는 조카가 네 살짜리 자기 아들에게 호박죽을 주니 손자아이도 잘 먹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한 그릇 더 사올 걸.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해야지, 하니 다니엘이 고개를 숙이며 고맙습니다, 했다. 그래, 많이 먹어라.
오후에 지하철을 타고 춘천으로 가다
원래는 춘천이 아닌 강촌역에 갈 계획이었다. 지난 7개월 정신을 일도해 만든 프로그램이 끝나자 내 정신을 둘러싸고 있던 만리장성이 흐물흐물 허물어져 내리고 있다. 기가 다 한 것이다. 다시 새로운 성을 쌓아야 한다. 그러려면 일단 성을 허물어야 한다.
어머니에게 죽을 드리고 집을 나온 나는 상봉에서 춘천행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몇 정거장을 안 가 내 몸에 이상신호가 왔다. 미세먼지 때문이었다. 차창 밖은 온통 잿빛이었다.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미세먼지가 지하철 안으로 들어와 내 폐를 마사지하는지 따끔따끔해져 왔다.
미세먼지,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지난 해 봄 나는 배낭을 메고 나 혼자 지리산 노고단을 올랐었다. 그 때 노고단에서 본 지리산은 중국에서 날아온 미세먼지로 뿌옇게 뒤덮여 있었다. 그 날 나는 생각했다. 국토가 작은 우리 한반도에 이제 청정지역은 없다. 지리산, 설악산, 그리고 제주도 한라산도 중국의 미세먼지 앞에서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야 한다. 그 날 미세먼지가 실로 심각하다는 것을 보았고, 느꼈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이 빠른 시간 안에 만나 미세먼지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한다. 나아가 대책과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미세먼지가 많은 날 출퇴근 시간에 공짜로 버스와 지하철을 타는 게 능사는 아니다. 차라리 홀짝 제도를 빨리 도입을 해 검은 연기를 내뿜는 경유차를 막아야 한다. 물론 화력발전소도 점진적으로 해체해 나가야 하고. 아울러 중국 왕서방 정부에 특단의 대책을 세워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 세계시장인 13억 중국 왕서방들 옆에 살고 있는 우리 한반도는 이제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다. 미래의 먹거리인 4차산업도 숨을 쉬어야 미래가 있고, 그리고 가능하다.
결국 청평역에서 내려 도로 돌아오고 말았다. 강촌에 간들, 강촌역에 내려 산에 간들 무슨 소용이 있나? 차라리 빨리 집에 가 미세먼지를 덜 마시는 게 내 폐를 보호할 수 있다.
일요일, 다시 복실이에게 가다
토요일, 옆지기는 오랜만에 일원 친정에 갔다. 어머니 일도 좀 도와주고 그리고 복실이도 볼 겸 해서 간 것이다. 그 날 밤 복실이를 만난 옆지기가 사진과 동영상을 보내왔다. 반갑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소식이 한꺼번에 날아왔다. 좀 점잖아졌다는 소식과, 복실이가 생리를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어린 복실이가 생리를 해? 6개월이면 한다는 것이다. 사람 나이로 따지면 15살 정도가 되니 이제부터 생리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일요일 오후, 일원으로 갔다. 문자를 하자 옆지기가 복실이를 데리고 나왔다. 나올 때의 복실이는 계백장군이다. 옆지기를 끌고 온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씩씩하게 복실이가 앞장을 서 나오고 있었다. 경비아저씨가 복실이, 어디 가노? 라고 물어도 대꾸도 안한 채 그냥 직진이다. 아파트 앞 마트 앞에 온 복실이는 직진을 하지 않고 왼쪽으로 돌아 안으로 들어온다. 열에 아홉은 그 자리에 내가 있다. 나를 본 복실이는 우다다 달려와 나에게 안긴다.
공원에서 kFC에서 산 뼈 없는 닭다리를 먹이다
마트를 나오면 바로 횡단보도다. 기다렸다 파란불이 들어와 가자, 하면 복실이는 빠르게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달려간다. 그리고 공원계단으로 뛰어 올라간다. 워띠, 이랴, 라고 하지 않아도 자기가 알아서 척척 뛰어가고 올라가고 제자리를 찾아간다. 학습을 통해 이미 각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잠시 후, 나는 주머니에서 닭다리를 꺼냈다. 냄새를 맡은 복실이는 온몸으로 반응을 한다. 기다려, 앉아! 하고 명령을 하자 앉는 흉내를 낸다. 나는 못 먹어도, 옆지기는 못 먹어도, 복실이는 먹는다. 자식사랑이 그럴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일 것이다. 진자리 마른자리 다 갈아 뉘이면서 우리 어머니는 자식들을 그렇게 키웠다. 자신의 입에 들어갈 음식을 자식 입에 넣어주고, 정작 본인은 가족들이 다 먹고 남은 음식을 달달 끌어 모아 배를 채우곤 한다. 그래서 부모님 은혜는 하늘보다 넓고, 바다보다 깊다고 했다.
난생 처음, 맛있는 kFC 닭고기를 먹어보았을 것이다. 그것도 뼈가 없는 순 다리살을. 천천히 씹어 먹으라고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일단 입에 들어가면 쯥쯥 급행이었다.
공원에서 세 번 변을 보았다. 집에서 보아야 할 변을 공원에서 다 본 것이다. 아마 스트레스 때문에 변을 못 보지 않았나 생각한다. 변을 보고, 소변을 다 본 복실이는 일주일 전의 자신으로 돌아가 마음껏 마장마술 경기를 펼치곤 했다. 김유신장군도 그렇게 빨리는 못 달려 보았을 것이다. 날아 다녔다.
대모산 배드민트장에 데리고 가다
요즘 반려견에 대해 말이 많다. 목줄을 반드시 채워야 한다. 그것도 모자라 집을 나올 때는 입막음도 해야 한다. 머지않아 반려견파파라치도 등장을 할 것이다. 복실이 때문에 우리 장모님 재산 다 날아가지 않나 모르겠다. 안 그래도 문 앞에 사람이 나타나면 막 짖는다는 복실이가 밖에 나오면 문제를 안 일으킨다는 보장이 없다. 나와 옆지기가 옆에 있으면 문제를 안 일으킬지 모르지만, 만약 경계의 끈이 풀어지면 한뎃잠을 잔 조상의 피를 물려받은 그 야성이 살아나 불특정 다수를 물지 마라는 보장이 없다.
어쨌든 배드민트장에서 두 시간을 뛰어 놀았다. 나도 지치고, 옆지기도 지치고, 복실이도 지쳤을 것이다. 뼈 없는 다리살 네 조각을 먹고 두 시간 넘게 뛰어 놀았으니 지칠 수밖에. 목줄을 한 다음 복실아, 이제 집에 가자. 복실이도 네네, 하고 따라왔다.
아파트 앞에서 헤어지다
이 자식이 좀 섭섭한 것은, 나올 때도 용감하게 나오지만 들어갈 때도 용감하게 들어간다. 한 번쯤 뒤를 돌아볼 만도 한데 그냥 빠른 걸음으로 들어간다. 오늘은 kFC 순살 닭다리 4조각까지 사주었는데, 인사도 없이 앞장을 서 들어가는 것이었다.
임마, 인사도 없이 가나?
힐끗 한 번 돌아보고는 그냥 직진이었다. 경비실을 지나 계단을 올라간 옆지기가 드디어 복도에 나타났다. 복실이는 보이지 않고 옆지기가 끌려가는 모습만 보였다. 집에 들어가면 감옥인데, 저렇게 용감하게 들어가는 그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겟다. 현실을 인정해서 그렇게 움직이는 것 같다고 옆지기는 진단을 했다. 결국 헤어진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복실이가 인지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독구다이가 된다는 것이다.
복실이와 헤어진 나는 교회에 갔다. 그곳 쉼터 의자에 앉은 나는 금방 잠에 빠져 꾸벅꾸벅 존다. 교인들이 많다. 장사가 될 수밖에. 왜 사람들은 단체나 집단 그리고 무리 속을 좋아할까? 위안을 받고, 비빌언덕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상이라는 망망대해에서 홀수는 외롭다. 감당이 안 된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소속이 없다. 불안한 것이다. 빽도 없고 실력도 없으면 더더욱 세상살이가 어렵다. 그래서 단체와 집단 속으로 들어간다. 그 속에는 공유할 든든한 매개체가 있다. 하느님과 예수가 있고, 그리고 부처가 있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소속이 되어 있지 않은 나는 그래서 외롭고 고독할까? 없는 하느님 앞에 모여든 저 구름떼를 보면서, 한편으로 강철보다 더 단단한 우리 인간도 틈이 너무 많다는 걸 목격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은 참으로 주체적이지 못하다. 허상을 쫓는 뜬구름이요 이슬이 아닐까, 하고 생각을 모으는데 내 핸드폰이 울렸다.
이제 나왔어요, 역에서 봐요.
알았다. 나갈게.
뒷이야기-어젯밤 우리 두 사람 녹초가 되었다. 복실이도 집에 도착해 발과 몸을 씻겨주자 거실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자더라는 것이었다. 나올 때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눈을 감더라고 했다. 산책도 적당해야 좋다. 운동도 마찬가지다. 넘치면 해가 된다. 지난 일주일, 너무 걸었다. 그래도 월요일부터 나는 또 열심히 걸을 것이다.2018122해발120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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