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나는 도서관을 나와 1호선을 타고 인천으로 갔다.
불현듯 인천의 몇몇 장소가 보고 싶었다.
바그다드 카페가 있을까?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은 초라한 ‘바그다드 카페’. 커피머신은 고장난지 오래고, 먼지투성이 카페의 손님은 사막을 지나치는 트럭 운전사들 뿐이다. 무능하고 게으른 남편을 쫓아낸 카페 주인 ‘브렌다’ 앞에, 남편에게 버림받은 육중한 몸매의 ‘야스민’이 찾아온다. 최악의 상황에서 만난 두 사람, 모든 것이 불편하기만 한 낯선 동거. 그러나 곧 야스민의 작은 마법으로 그녀들의 관계는 전환점을 맞이한다. 행복해지려는 노력, 꾸밈없는 미소.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해가는 소중한 시간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던 '바그다드 카페'도 두 사람의 마법으로 따스하고 행복한 시간이 깃들게 되는데...황량한 사막에서 일어난 마법 같은 기적!당신의 삶을 위로할 가장 아름다운 뮤직바이블이 찾아옵니다!
내가 찾아가는 바그다드 카페는
영화속의 그 바그다드 카페가 아니다.
때는 2003,4년
그 시절의 나는 인천에 살고 있었다.
인천역 앞에 있는 낡은 일본식 2층 여관이었다.
불을 끄고 잠을 자면 바퀴벌레가
내 몸을 수시로 점령하곤 했던,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곤한 그런 낡은 여관에 나는 살았었다.
2년 넘는 인천생활에서 그래도 위안이 있었다면,
바로 도서관이었고, 바그다드 카페였다.
그 때의 내 주 무대는 인천공항과 인천공항 옆 영종도 신도시였다.
그곳 현장에서 나는 노가다 일을 하고 있었다.
일당 5만 원짜리 잡부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와 여관에 들어가면 숨이 콱 막혀왔다.
방 안이 더웠다.
낡은 방,
창문을 막고 있는 낡은 철창,
여름밤,
가끔씩 밤에 녹초가 되어 잠에 떨어져 있을 때,
난데없이 누군가가 내 몸을 더듬곤 했다.
깜짝 놀라 일어나 불을 켜면,
조바 일을 하는 치매초기의 70대 할머니였다.
'할머니, 정신 차리세요!'
라고 하면
할머니는 허공을 향해
'여보,'
하고 중얼거리며 내 방을 빠져 나가곤 했다.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도서관이었고, 바그다드 카페였다.
비가 오는 날, 일을 나가지 않으면 도서관에 갔다.
그리고 힘든 일을 마치고 온 날이면 나는 바그다드 카페를 찾아 한잔의
커피와 음악에 녹초가 된 내 몸을 힐링하곤 했다.
있을까?
도서관을 먼저 찾았다.
시립율목도서관은 그 자리에 굳건하게 있었다.
변한 건, 식당이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그 식당에서 떡라면과 비빔밥을 즐겨먹곤 했다.
나는 그 식당의 2층 가장자리를 즐겨 찾았다.
사막의 바그다드 카페에는
먼 길을 가는 트럭기사들이 잠시 쉬어가는 오아시스였다.
내가 즐겨 찾은 도서관과 바그다드 카페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도서관과 바그다드 카페가 없었으면
그 힘든 노동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일단 여관을 탈출하자!
여름이 지나고 기온이 서늘해지면서 나는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본식 건물이고,
난방이 안 되는 다다미방이라 전기장판을 사용해야 했다.
위험했다.
방마다 전기장판을 쓰고,
방마다 일회용 개스레인지로 밥을 해먹곤 했다.
언젠가 불이 날 것 같았다.
안 된다, 방을 옮기자!
그래서 인천역에서 동인천역의 어느 고시원으로 옮겼다.
깨끗했다.
샤워도 할 수 있었고, 세탁도 할 수 있는 원룸이었다.
방을 옮기고 두 달 후,
어느 날 밤,
그 낡은 여관집에 불이 나 7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소식을 여관집 앞에 살고 있는 사람이 현장에서 그 이야기를 했다.
'형님, 형님, 잘도 나갔습니다.
그 집에 밤에 불이 나 7명이 타죽었습니다.
형님방에 사람이 창문을 붙잡은 채
아 뜨거워 아, 뜨거워'
하면서 죽었습니다.
7명 모두 중국에서 온 동포들이었다.
후일 그 친구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할머니가 일을 하면서 한 달에 10만 원씩 받은 월급을 전부 다다미 밑에
꼭꼭 숨겨 보관을 했는데, 백만 원이 타고 6백만 원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독하게,
영종도 한파 추위와 싸우며 일을 했고,
독하게,
온몸을 태우는 뜨거운 열기와 싸우며 일을 했고,
독하게,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고,
그리고 바그다드 카페에서 내 정신과 마음을 붙잡곤 했다.
그 바그다드가 아직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싱가폴에서 노동 일을 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동성고등학교 출신의 채씨 성을 가진 채형이 나와 짝이 되어 끝까지 일을 했다.
채형이 가끔씩
'오형, 일을 그렇게 하지 마소.
우리는 일당이 5만 원짜리요.
오형은 지금 8만 원어치 일을 해요.
그렇게 하지 마소, 골병 듭니다.'
그 채형이 나를 어떻게 읽었는지, 어느 날 물었다.
'오형, 오형이 만약 인천시장이 되면 나에게 무슨 자리를 줄 겁니까?'
'청소과장.'
'청소과장이라고요? 천날만날 먼지를 뒤집어쓴 채 일을 하는데,
그것도 모자라 청소과장입니까?'
'청소과장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데요.'
채형은 밴댕이회를 좋아했다.
나는 동해바다 출신이라 서해에서 나는 고기를 잘 먹지 못했다.
밴댕이도 내 입에는 맞지 않았다.
자기 트럭을 몰다 오십견이 와 조카에게 맡기고
노동현장에 나왔다는 채형,
끝내 주소와 전화번호를 모른 채 헤어졌다.
'채형, 건강하십니까?'
채형은 바그다드 카페를 몰랐을 것이다.
도서관도.
어쨌든 나와 짝이 되어 정말 죽을만큼 열심히 일을 했다.
그 때 두 사람, 고생 많이 했다.
뒷이야기-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내 정신과 몸이 부르르 떨리곤 한다. 나무 한 그루 없는 인천공항 허허벌판에서 일을 하는데, 마실 물이 없었다. 찌는 듯한 태양과 열기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삼성이나 엘지 대우 같은 현장에는 현장 곳곳에 시원한 물과 얼음 그리고 소금을 비치해놓고 마시고 먹을 수 있게 해놓았다. 그런데 대림산업은 현장에 물이 없었다. 허허벌판이라 물을 마실 곳이 없었다. 현장 관계자에게 물으니 왈 '올 때 물을 가지고 와야지 우리한테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순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대림산업은 망해야 한다. 그 때 그 허허벌판에 대림산업의 오너가 있었으면 나는 그를 곡갱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찍었을 것이다. 2018420해발120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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