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파괴와 제행무상
신석기혁명에서 산업혁명까지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나아지지 않은 주된 이유는 하나, 창조적 파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인간은 탈과 혁신을 두려워한다. 특히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부류들은 더더욱 그렇다. 불어오는 바람과 파도를 멈추게 할 수 없듯이, 저 두려움을 갈아엎을 수 있는 한 마디가 있다. 불교의 핵심교리인 “제행무상”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다 변한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하다.
페스트가 중세 유럽을 바꾸다
흑사병으로 알려진 페스트가 흑해 돈 강 하구의 항구도시 타나에 상륙한 것은 1346년이었다. 쥐벼룩이 옮기는 흑사병은 실크로드를 여행하는 상인을 따라 중국에서 들어왔다. 사실 중국이 아닌 미국이어도 상관없다. 한국이어도 마찬가지다. 흑사병은 빠르게 퍼져 1348년 봄에는 프랑스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까지 퍼졌다. 흑사병이 창궐한 지역은 인구의 절 반 가량이 죽어나갔다. 이탈리아 중부 피렌치에 당도한 병마를 직접 목격한 이탈리아 작가 조반니 보카치오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괴질이 엄습하자 인간의 지혜와 재주는 죄다 부질없었다. 페스트는 예측불허의 가공할 모습으로 번져나갔고, 처참한 광경이 이어졌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국왕은 잉글랜드에 곧 닥칠 페스트를 물리치기 위해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기도회를 주관해달라고 당부했고, 수많은 주교들이 페스트를 물리치기 위해 사제들에게 서한을 보내면서 낭독하도록 했다. 사제들은 주민들과 함께 기도로 날밤을 새웠지만 소용없었다. 흑사병으로 잉글랜드 인구의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페스트는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중세 유럽사회에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페스트가 몰고 온 파장은 컸다. 이후 포용적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로 탈바꿈을 한 잉글랜드는 후에 명예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면서 투자와 혁신으로 경제의 틀을 잡으면서 부국으로 탈바꿈을 하였고, 변화의 물결에 올라타지 않은 동유럽은 여전히 닫힌 정치, 경제제도를 고집해 가난을 지게에 진 채 버겁게 살아가고 있다.
페스트 때문에 5천만 명의 인구가 목숨을 잃었지만, 페스트로 인해 제도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 작은 물꼬인 포용정치와 경제제도가 이루어낸 성과는 실로 컸다. 그 때까지 왕과 일부 엘리트층이 누리고 있던 절대 권력이 주민들에게 돌아갔고, 그들이 쥐고 있던 부와 경제활동도 주민들에게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코로나19는 다시 한 번 변화를 주문하고 있다
21세기 중국우환에서 시작한 코로나19는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전 세계인을 공포로 몰아가고 있다. 페스트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미국은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코로나19는 정치, 경제, 그리고 우리 인간의 삶을 절벽 쪽으로 몰아넣으면서 여전히 전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는 코로나19는 다시 한 번 우리 인간의 사고를 시험하고 있다.
1. 시장주의와 무한경쟁
2. 탈과 혁신, 배려와 공존
페스트도 그랬고 코로나19도 예외라는 게 없다. 기독교를 믿든, 가톨릭을 믿든, 불교를 믿든, 무슬림을 믿든, 명상을 하든, 요가를 하든, 그리고 채식을 하든 아무 관계가 없다. 코로나19에 감염이 된 사람과 무방비로 접촉을 하면 열에 아홉은 감염이 된다. 코로나19를 피할 수 있는 길은 하나, 사람과의 접촉을 피하는 것이다.
코로나19 앞에서 우리 인간은 생각하는 로댕이 되어야 한다. 코로나19는 도대체 어디서 왔으며 그 원인은 무엇인가? 어디서 잘못되었나? 그렇게 물어 들어가면 문제가 나온다. 우리 인간과 자연과의 불협화음에서 온 것이다. 돌아보면 우리 인간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자연을 어마무시하게 파괴시켜왔다. 자연의 파괴는 그 안에 살고 있는 동물과 식물의 둥지를 빼앗아버렸다.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동물은 어디로 갈까? 인간세계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결론은 우리 인간의 탐욕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자연은 우리 인간에게 코로나19를 선물하면서 동시에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우리 인간이 파괴시킨 자연을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 자연은 우리 인간과 동, 식물의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공존해야 한다. 또 하나, 각자도생이 아닌 전체와의 어깨동무이다. 전 세계가 하나가 되어 코로나19와 싸워나가야 한다. 그 길은 탈이고 혁신이다. 가장 먼저 사고의 지각변동이 일어나야 한다.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내가 두려워하는 인간이 있다. 책 한권에 자신의 존재를 던지는 자들이다. 프로는 프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프로가 두려워하는 상대는 룰도 없고 똥배짱밖에 없는 아마추어다. 책을 수만 권 읽은 사람도 달랑 책을 한 권 읽은 사람에게는 이길 수가 없다. 우리 주변을 보면 책 한권으로 이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이 많다.
신과 종교를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이제 신과 종교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기독교는 우리 인간이 기대어야 할 언덕이 아니다. 14세기에 나타난 페스트와 21세기에 나타난 코로나19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나는 솔직히 신이 있었으면 하는 사람이다. 신의 부재를 생각하면 마음이 어둡고 정신이 허해진다. 깜깜한 밤하늘에 별과 달이 없으면 어떻게 길을 찾아가나? 두려움은?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산 속 길을 걷고 있는데 건너 산 속에서 ‘부엉’ 하고 부엉이 소리가 들려온다. 순간 얼어붙은 마음이 녹는다. 고맙고 반갑다. 편안함이 찾아온다. 그렇듯이 신이 있어야 하고 종교가 있어야 한다. 신은 길을 밝히는 별이요 달이다. 깜깜한 산 속에서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는 종교이다.
우리 인간이 만든 신과 종교를 어떻게 섬기고 실천해야 할까? 첫째도 둘째도 그리고 마지막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조용히 묵상해야 한다. 이성과 과학으로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미국이나 한국의 기독교는 아니다. 길을 가다 교회 안에서 통성기도소리가 들려오면 화가 치솟는다. 가슴을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주여! 하고 신을 찾으며 안 된다. 조용히 묵상하면서 자기 자신을 찾고 이웃을 찾아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 입장에서 보면 일본국민은 전부 죽어 지옥에나 갈 사람들이다.
나는 생각한다. 기독교나 무슬림의 그 자리에 그래도 품격이 있는 가톨릭이나 불교나 명상과 좌선이 자리해야 한다. 정말 중요한 건 신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다. 내가 누구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 나의 근원을 찾고 이웃을 찾고 전체를 찾고 그리고 가치 있는 삶을 찾아야 한다. 그런 다음 신을 찾고 종교를 찾아야 한다.
오랜 세월 채식을 해오고 있고, 나와 이 세상을 찾고 내 몸을 단련시키기 위해 매일 걸으며 명상을 하고 있는 나도 코로나19를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채식을 하고 명상을 한다고 코로나19가 비껴가지 않는다. 코로나19를 피할 수 있는 길은 다중이 모이는 장소를 피하고, 그리고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일뿐이다. 안양에 있는 모대학교를 뒷구멍으로 들어가 졸업을 했는지 안 했는지 불분명한 저능아 전광훈 같은 사이비 목사가 이끄는 그 무리에 끼어 있는 전직 정치꾼들과 신자들을 보라! 정상이냐 비정상이냐? 상식이 1도 없는 무리들이다. 안타깝게도 저것이 우리 대한민국 기독교의 민낯이다. 우리나라 대형교회 목사들은 하나 같이 전광훈과 같은 수준이다. 그들은 신과 종교를 이용해 돈을 버는 장사꾼이다.
지금은 21세기.
우리 인류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탈이고, 혁신이고, 배려이고, 공존이다!
사고를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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