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화두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오주관 2021. 4. 23. 14:37

 

4코스를 걷다

 

어제 아침, 오늘은 가보지 않은 올레길을 가보자. 라고 하자 집사람이 핸드폰으로 검색을 하더니 4코스를 이야기했다. 표선해수욕장에서 남원까지인데 거리는 19Km. 날씨를 검색하니 최고기온이 23도로 나온다. 오늘은 4코스를 걷자.

 

나는 준비를 했다. 어제 7코스에서 마시다 남은 삼다수에 물을 채웠다. 집사람이 꺼내 놓은 쑥찹쌀떡 두 개도 넣었다. 그리고 사탕 두 알. 어제 잊어먹은 선글라스도 챙겼다. 며칠 전 아름다운가게에서 5700원을 주고 산 선글라스인데 가벼웠고 눈이 시원했다. 합격.

 

 

표선해수욕장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 들어가자 모래사장이 넓은 해변이 나타났다. 모래가 귀한 제주도에서 표선해수욕장은 예외다. 오늘도 땀을 소두 한 말은 흘리겠구나. 땀은 두렵지 않다. 이미 나는 땀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면역력이 생겨 신경을 안 쓴다. 문제는 다른데 있다. 내 고민의 8할은 더위와 바람이 아니라 시간, 미래, 기다림, 그리고 타이밍 등이었다.

 

사막을 걷는 기분이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계속 식혀주고 있지만 그러나 오늘도 나는 혼자다. 동행이 없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대개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걷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헤브 나이스 데이다.

 

 

방파제에서 노래를 부르다

 

8Km에 왔을 때 나는 방파제에 갔다. 짧은 방파제 한쪽에는 부부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파제 입구에는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바다를 상대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바람이 불고 있고, 파도가 치고 있는 바다를 보니 내 고향이 떠올랐고, 그리고 최백호씨가 부른 영일만 친구가 생각났다. 쉬는 김에 노래나 한 번 불러보자. 집사람은 내 노래를 듣고 음치라고 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가 내 음악의 전성기였다. 그 이후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오지 않아 계속 후퇴를 한 것이다. 지금까지 노래방에 간 기억이 다섯 번도 안 된다. 그러니 노래솜씨가 있을 리 만무다.

 

 

가도 가도 고비사막이 아니고 표선리였다. 바다에 떠 있는 등대를 보자 남원항구의 그 등대인가? 아니었다. 터닝 포인트가 없는 외길이라 힘은 배로 들었다. 20Km의 올레길이라도 10Km 지점에서 돌아오면 힘이 좀 덜 든다. 19Km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그 옛날 하루에 50Km씩 어떻게 걸었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12월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의 한복판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걸었었다. 그 여정도 아마 지금의 나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어제는 내가 이곳 제주도에서 걸은 올레길 중에 가장 힘든 날의 하루였다. 중간 지점 어디인가부터 4코스를 안내하는 띠가 보이지 않아 애를 먹었다. 도로 어디에도 띠는 없었다. 그러다 도로 왼쪽으로 꺾어지는 그 지점에서 띠가 보였다. 올레길을 안내하는 띠는 믿음이고 희망이다.

 

인내의 그 끝을 바라보면서

 

오후 1시부터 걷기 시작해 남원항구에 도착하자 오후 6시였다. 코너를 돌아 작은 중국집을 보자 가슴에 동계가 왔다. 배가 출출했고 고팠다. , 짜장면 한 그릇 먹고 갈까, 하다 집사람을 떠올렸다. 그냥 가자. 집에 가서 상추쌈에 현미밥을 먹자. 현미밥, 상추, 오일장에서 사온 갓김치, 양파와 감자 두부 그리고 시금치를 넣고 끓인 된장국, 김치, 깍두기가 전부이지만 맛은 항상 꿀맛이다. 상추와 깻잎에 밥을 한 숟가락 얹고 그 위에 가위로 자른 갓김치를 하나 얹어 먹으면 두 사람이 먹다 한 사람이 죽어도 모를 만큼 맛이 있다.

 

 

정류장에서 231번 버스에 올라 자리에 앉자마자 금방 고개가 꺾였다. 내가 눈을 떤 것은 삼성여고 앞이었다. 잠시 후 중앙로터리. 집에 도착해 노트북을 켜고 이메일을 확인했다. 별 소용이 없는 이메일 세 통을 휴지통에 보내고 나자 집사람이 문을 열었다. 상황이 종료되었다. 그 때가 750분이었다. 나는 용기백배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손에 쥐고 악당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오늘 어땠어요?”

“죽을 맛이었.”

“4코스가 안 좋아요?”

좋지. 그런데 일자로 계속 걸어 힘이 들었다.”

그랬어요.”

“4코스를 걸으면서 내가 느낀 건, 미래였다. 미래도 오늘 같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포기할 수는 없다. 계속 힘을 다해 가야한다는 것.”

좋은 코스였네요.”

그러네.”

천국의 다른 이름은 지옥일 거예요.”

맞다. 윈스턴 처칠이 이런 말을 했다.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찾아내고, 낙관론자는 모든 어려움에서 기회를 찾아낸다.”

당신이네요.”

길을 만든다는 게 정말 힘이 든다. 요약하면, 이 세상을 넓고 깊게 바라볼 것. 그리고 수직이 아닌 수평적 사고에서 모든 길을 바라볼 것. 또 하나, 4코스가 힘이 들었지만 끝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끝을 향해 인내하면서 오늘도 내일도 나는 걸을 것이다.”

박수!

나도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