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부산기행

오주관 2007. 6. 9. 20:10
 

탕을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내 머릿속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감자탕과 닭개장은 속을 썩이지 않는데 미꾸라지는 내내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날도 전날과 비슷했다. 하루에 세 번씩 미꾸라지를 살생해 탕을 끓였지만 원하는 맛이 나지 않았다. 하, 이 미물이 나를 욕보이네. 사 먹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내가 끓이니 수고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십 몇 년 전, 경주 남산 뒤에 있는 오지 마을의 폐교가 된 분교를 얻어 내려갔을 때 내 주제는 건강한 먹거리 창출이었다. 무 조미료와 건강한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우리나라 식 문화를 획기적으로 바꾸어 보자라는 주제를 가지고 내려갔다. 물론 물거품이 되고 말았지만.

 

 

 

 

선산 휴게소에서 바라본 밤하늘

 

그 주제를 가지고 다시 시작한 탕 연구소. 나는 생각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조미료와 설탕에 중독 되어 있다. 텔레비전을 보라. 전국의 유명 음식점들을 소개하는 것을 볼 때마다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다. 하나가 설탕이다. 어느 음식이든 설탕이 철대반죽을 하고 있다. 막말로 설탕이 들어가지 않고는 음식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설탕을 음식에 쏟아 붓고 있다.  

 

 

 

 

 설탕, 소금, 쌀밥이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 이 세 가지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우리의 혀를 자극한다는 것이다. 현미가 좋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그런데 먹기가 어려운 것은 지독하게 껄끄럽다. 보리밥도 하루 이틀이지 한 달 계속 먹으라고 하면 먹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억세고 뻣뻣한 내용물을 씹는 것을 싫어한다. 딱딱한 것과 쓰고 떨떠름한 맛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달아야 한다.

빛깔이 좋아야 한다.

씹기 편해야 한다.  

 

 

 

 

식문화에 녹색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풀무원과 어슷비슷한 사고를 했지만 한쪽은 성공을 했고 나는 실패했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재원과 인적 네트워크와 시스템 부재가 그 원인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독불장군 스타일이다. 내가 하늘이고 내가 머슴이다. 그 두 가지만 받쳐 주었다면, 아니 내가 그쪽로 신경을 써서 그것들을 구축했다면 내 역사는 엄청 달라졌을 것이다.  

 

 

 

 

하늘 아래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다.

  

 

 

 

 강남에서 학원을 접고 내 일에 동참을 한 옆지기.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그날까지 우리가  싸울 대상은 탕 음식이다. 무 조미료, 건강한 재료를 사용하여 우리 식 문화를 바꾸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싶다. 물론 성공해야 한다. 밑지면 안 된다. 그 다음 사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가게에 나올 때마다 나는 두 손이 닳도록 빌고 빈다.  

 

 

 

 

 이번만큼은 외면하지 말고 봐 주십시오.

물론 미치겠습니다.

나머지 돈이 붙는 문제는 당신이 좀 도와주십시오.

저는 돈하고는 사돈에 팔촌보다 더 먼 사람입니다.

쭉 지켜보아서 아시겠지만, 저라는 사람 정말 진국이지 않습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밀물처럼 몰려드는 스트레스에 당할 재간이 없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머리에서 김이 나기 시작했다. 잠시 들판에라도 나가 크게 숨을 쉬고 싶었다. 광야에 나가 두 팔을 벌린 채 목청껏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내 전생은 무당이거나 아니면 음악가였을 것이다. 정명훈 씨만큼 클래식을 많이 감상한 나. 대중음악도 좋아하고 팝도 좋아하고 국악도 좋아한다. 그 망할 담배 때문에 후두가 상해 이제 노래를 부를 수 없지만 어쨌든 노래를 잘 불렀었다. 무엇보다 곡 해석이 좋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날 밤, 가게 문을 닫으면서 여행 떠나자 라고 말했다. 척하면 삼천리라고 옆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요?

일단 터미널에 가자.

그래요.


갔다. 쭉 보았다. 동해냐 서해냐 아니면 남해이냐.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옆지기의 손을 잡고 매표소로 갔다. 그래, 부산으로 가자. 바다가 있는 부산으로 가자. 부산에는 내 누이동생이 살고 있다. 한번 만나자. 안 만난 지 십 년 정도 되는 것 같다.

  

 

 

 

 새벽 바다에 뛰어든 사람들

 

 

 

  

밤 10시 30분 고속버스에 오른 우리는 그리고 금방 잠에 떨어졌다. 중부고속도로를 달린 버스가 멈춘 곳은 선산휴게소. 오줌통이 빵빵했다. 비우고 나오자 밤하늘에 둥근 달이 휘영청 떠 있었다. 캔맥주라도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주류는 판매하지 않는다고 했다. 커피 한잔으로 정신을 수습하고 차에 올랐다. 부산까지 자자.   

 

 

 

  

새벽 4시 30분 부산 도착. 캄캄했다. 택시를 잡아탄 나는 해운대로 가자고 말했다. 새벽의 도로는 한산했다. 택시는 밤을 가르며 총알 같이 달리고 있었다. 학이가 떠올랐다. 학이는 잘 살고 있겠지. 그 시절 우리는 담배가 늘 부족했다. 해서 밤이면 학이 집에 쳐들어가 부족한 담배를 학이 담배로 충족을 시키곤 했다. 나보다 골초인 학이에게는 늘 담배가 있었다. 학이를 못 본 지 어언 20년이 지난 것 같다. 동네 불알 친구였던 학이. 학이가 살고 있고 내 누이동생이 살고 있는 부산. 입을 닫고 있는 기사에게 농 아닌 농을 했다.

 

 

 

 

 

아저씨.

예.

우리, 해운대에 죽으러 왔습니다.

예?

이 택시가 아마 마지막일 겁니다.

아저씨, 너무 섬뜩하네예. 그래지 마소.

해운대에 가서 오늘 아침 일출이 션찮으면 죽을 것이고, 괜찮으면 살 겁니다.

아저씨, 어째든지 사소.

옆지기가 몸으로 웃고 있었다. 동해에 갔을 때도 그랬다. 기사가 내내 살아보라고 애걸복걸했다. 그래서 오징어 회를 먹어보고 션찮으면 죽을 것이고, 맛이 좋으면 다시 올라간다고 하자 자기가 회를 잘 하는 식당을 안내하겠다고 했다.

 

 

 

 

기장 대변항. 유감이 많은 동네다. 오래도록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

하다. 첫째 내항의 물을 깨끗하게 살려야 한다. 기장군이 힘을 다해 노력을 해야 한다. 그 다음

외지 사람들에게 친절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내 고장의 특산물을 파는 것 못지

않게 친절해야 한다. 청결, 친절, 예를 다할 때 내 고장이 빛을 발한다. 대변항에서 밥을 벌어 먹

고 사는 사람들은 명심해야 한다.

 

설사 이야기

 

그날 아침 해를 해운대에서 맞이한 우리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기장으로 갔다. 가는 길에 달맞이 고개도 구경하면서 가자 라고 생각을 하고 버스에 올랐는데 버스는 다른 길로 가는 것이었다. 그 유명한 달맞이 고개는 보지 못한 채. 

 

어쨌든 기장 대변항을 찾았을 때 아침이었다. 아침 바다는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기장의 대변은 멸치와 미역이 유명하다. 멸치가 잡히는 봄과 가을이면 멸치회를 맛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곤 한다. 그 생각을 하면서 기장 대변항을 찾았지만 멸치는 끝물 그 뒤 같았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바닷물을 보니 먹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저 물에 멸치를 털고 저 물에 멸치를 씻는다고 생각하니 입맛이 도망가버렸다.

 

그런데다 새벽부터 집어넣은 소주가 장을 맛사지 했는지 속이 꾸리꾸리했다. 세상에 참을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소변과 설사다. 더구나 설사는 더 더욱 그러하다. 돌아보니 화장실이 보이지 않았다. 대변항에 공중 화장실이 없다니. 걸음이 바빠진 나는 옆지기에게 가방을 맡기고 이집 저집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어느 집도 나를 반기는 집은 없없다. 마침 길에 나와 있는 아저씨에게 화장실을 좀 이용할 곳이 없느냐고 물으니 없다는 것이었다. 해서 아저씨 집 대문이 열려 있어 들어가려하니 들어가지 마라고 하는 것이었다. 저런 인심하고는. 멸치회와 미역은 팔아 먹을 줄 알면서 외지에서 온 손님 대접은 나 몰라라 하는 그 아저씨가 불쌍하게 보였다. 도둑놈 하고는... 라고 씨부리면서 다방 간판을 향해 뭐가 빠지도록 달려갔다. 셔트가 굳게 잠겨 있었다. 이런 떠갈... 모가지를 내놓은 내용물은 여차하면 쏟아놓을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이고, 나 죽네.... 이 대변항이 사람 잡네...

 

나를 살려준 곳은 딱 한 군데. 어느 상가건물이었다. 그곳에서 바지를 내리고 그리고 속옷을 내리자마자 쏟아져내린 내용물. 팬티를 보니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이런... 전등사에 가서도 설사를 만나 그 지경이었는데, 이곳에서도 또 설사를 만나다니... 설사가 그날 아침의 내 마음과 자존심에 찬물을 쏟아부어버렸다.   

 


부산에서의 기행은 그날 새벽 해운대에서 시작되었다.     

 

 

 

 

 

 

 

 

 

 

 

 

내 누이가 하고 있는 아이스크림가게. 그날 아침 나는 밀대로 바닥청소를 해주었다. 누이를 위

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었다. 옆지기는 물걸레로 탁자를 닦고. 

 

 

 

 

뛰어난 솜씨를 가진 강태공 아저씨.  

 

 

 

 

 방파제에서 바다와 놀다

 

 

 

  

 

 

 

 

 내 누이가 살고 있는 광안리 바닷가 앞 아파트. 

 

 

 

 

백사장에서 대충 옷을 벗더니 체조도 생략한 채 바닷물에 뛰어든 젊은이. 지켜보았다. 한 시간

넘게 수영을 하는 것이었다. 속에 천불에 났나? 아니면 체력 단련을 위해 저렇게 수영을 하나?

어쨌든 대단한 사나이였다.  

 

 

 

 

횟집에서 한 잔. 서해의 명물인 낙지가 부산에서 그 빛을 다했다. 서해에서 먹었을 때보다 두 배

더 맛이 있었다. 회만 만나면 내 입은 스마일이 되곤 한다. 상대가 회를 싫어하는 사람이면 나는

두 배로 더 행복해진다. 포식할 수 있어서...

  

 

 

 

 내 매제와 누이. 매제를 몇 년 만에 보는 지 모르겠다. 십 년은 된 듯하다. 사람 좋기로 이름이난

매제. 성실하고 자상하다.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다 사표를 내고 부산에 내려와 사업을 하다 크게

망해버렸다. 그래서 한 때 어려운 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성실이 다시 가정을 일으켜 세

웠다. 그 반면에 내 누이는 똑소리가 날 정도로 억척이다. 딸만 둘을 두고 있는데 억척 같이 교육

을 시켰다. 맏딸은 지금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둘째이면서 막내는 이대 법학과 3학년에 재

학중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내 누이는 참으로 예뻤다. 두 갈래 머리를 땋은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고생했다. 앞으로 남은 삶 보답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날 네가 우리 두 사람에게 정을 베푼 것

기억하고 있다.  

 

 

 

 

 밤바다를 향해 포즈를 잡은 세 사람. 

 

 

 

  

 누이 아파트 안 풍경

 

 

 

 

깔끔했다.  

 

 

뒷이야기- 그날 밤을 누이네 집에서 쉰 우리 두 사람은 그 다음날 누이가 정성스럽게 차려준 아침을먹고 회사로 향하는 매제의 차를 타고 터미날로 갔다. 십 년 만에 만난 누이네 식구. 앞으로는 자주 만날 것이다. 매제와 누이, 몸을 잘 다스리면서 행복하게 살아라. 200765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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