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주제는 탕이다.
잠 속에서도 탕을 만난다. 앉아도 탕 서도 탕, 낮에도 탕 밤에도 탕. 오매불망 탕으로 시작해 탕으로 끝을 맺는다. 꿈 속까지 따라다니는 탕.
탕에 미친 지 한 달 반. 두 가지 탕은 마스터를 했는데 하나가 나를 골려먹고 있다. 미꾸라지로 끓이는 추어탕이 그것이다. 어떻게 하면 담백하면서 맛깔스럽게 만들 수 있느냐 가 최대 관건이다.
첫째, 맛이 있을 것.
둘째, 담백할 것.
셋째, 누구나 다 먹고 싶어 하는 추어탕이 될 것.
내 팔자에 탕 장사로 나설 줄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먹거리에 관심이 많다 보니 이렇게 뛰어들고 말았다. 하지만 막상 덤벼 보니 이게 영 만만치가 않았다.
제목은 녹차 추어탕이다. 녹차는 과학이다.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강식품이다. 해서 녹차가 내 탕의 기본이다. 어느 날은 수삼 끓인 물도 넣고 어느 날은 쇠고기 끓인 물도 넣고 또 어느 날은 곱창까지 넣어서 끓여 보았지만, 미꾸라지가 가지고 있는 비린내는 잡히지 않았다.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인터넷이라는 망망대해에 사력을 다해 항해를 계속했지만 답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은 2 년 전
KBS 2 텔레비전에서 방송한 무엇이든 물어 보십시오 라는 프로에 나온 요리 전문가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지만 시원한 답을 구하지 못했다. 그 다음날은 원주에서 추어탕 하나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는 식당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 답은 아주 간단했다.
된장 넣고 끓이면 안 납니다.
송수화기를 놓으면서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지매요, 된장은 처음 시작한 날부터 넣었니더.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그래, 가자. 영풍문고에 가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코를 박고 추어탕과 싸우길 여러 날. 결론은 대학교수든 요리 연구가든 맛집 사장이든 약속이나 하듯 답이 똑 같다는 것이었다. 정말 노하우는 임꺽정이 눈물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설렁 설렁 설렁탕처럼 넘어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탕과 싸우길 한 달 반. 드디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래, 기술자를 부르자. 한탕 끓이는데 20만 원 받는 그 기술자를 부르자. 내가 졌다. 항복!
그날 밤, 그 기술자에게 전화를 해 이틀 후 아무거시 동네에 있는 탕 연구소로 와 주십시오, 하고 정중하게 부탁을 했다. 그렇다면 그날 아침 9시 30분에 탕 연구소로 가겠습니다. 그 이튿날 기술자를 맞이하기 위해 나는 땀을 콩죽 같이 흘리며 경동시장에 가 미꾸라지 5킬로를 사 왔다. 청계천과 경동시장에 날이면 날마다 도장을 찍을 줄 나 까마득히 몰랐었다. 내가 놀 곳은 세종로가 아니면 여의도인 줄 알았었다.
내 현직은 장돌뱅이.
오며 가며 그러나 나는 늘 노래를 부르곤 했다. 옆지기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 전생에 나는 무당이었거나 가수였거나 아니면 혁명을 도모하다 붙잡혀 오지로 귀양살이를 가 그곳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 혁명가였는지 모른다. 내 옆지기는 늘 말한다. 당신의 언어 중 50프로는 욕이다. 그때마다 나는 말한다. 욕이 아니다. 건강한 일상 언어이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난 곳은 바닷가다. 바닷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좀 과격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상 언어일 뿐이다.
어쨌든 나는 무당이었거나 가수였거나 아니면 목숨이 날아간 혁명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런 내가 오늘 이렇게 땀을 콩죽 같이 흘리며 탕에 빠지다니…….
당신에게, 미안하다. 진실로.
디데이. 기술자가 왔다. 60이 채 안 되어 보였다. 남원이 고향이라고 했다. 추어탕의 본향 중에 하나가 아닌가. 그곳 넘버 원 집에서 기술을 배웠다고 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 종로 한복판에서 10년 간 추어탕 장사를 했다고 했다. 하! 도사 어른을 맞이했구나! 복도 많제. 인터넷에서 추어탕 도사님을 만났다. 나는 예를 갖추어서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도사님, 한 수 가르쳐주십시오.
오늘부터 저는 당신의 제자입니다.
우선 끓이는 방법이 달랐다. 생 들깨로 육수를 만드는 것이었다. 해감을 시킨 미꾸라지를 아무것도 넣지 않고 끓이더니 믹서기에 넣고 가는 것이었다. 도사님 같이 보였다. 수염만 있었으면 도사였을 텐데…… . 손놀림이 프로였다. 프로는 아름답다, 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다 아름다웠다. 한 달 전수시켜주는데 5백에서 1천 만 원을 받는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정통으로 도사님을 만났구나.
다 끓였다. 이제 남은 건 시식. 우리 두 사람은 숟가락으로 추어탕을 떠 천천히 입 안으로 가져갔다. 먹었다. 꿀떡!
이럴 수가……
옆지기가 나를 쳐다보았다. 비린내 귀신이 입 안에 가득했다. 하! 20만 원이 떠올랐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정말 안 되는데……이 귀신을 두드려 잡기 위해 우리 두 사람이 들인 공이 20층 높이 정도는 된다. 그 귀신 때문에 우리 두 사람은 서울을 탈출해 어디론가 도망을 가곤 했다. 그런데 도사님이자 프로인 그 기술자가 만든 추어탕이 우리가 만들었을 때와 똑 같은 비, 린, 내, 가 나는 것이었다. 두 사람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비린내가 나는데요?
나는 애초에 출발할 때 대 원칙이 있었다. 무 조미료와 건강한 재료가 그것이다. 조미료를 넣을 생각은 0, 1% 도 없었다. 설탕과 조미료에 세뇌당해 있는 많은 사람들. 미안하지만 나는 그들을 구할 생각으로 이 사업을 시작했다. 아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돈을 벌 생각이다.
도사님 얼굴이 파리해졌다. 국자를 들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프로님이 말했다. 조미료를 넣으면 비린내가 나지 않습니다. 고개를 숙인 채 생각하는 로댕이 되어 있던 나는 옆지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짓을 했다. 옆지기가 슈퍼에 가 미원과 다시다를 사 왔다. 도사님이 말했다. 다 넣습니다. 안 넣는 집이 없습니다. 넣어도 엄청 넣습니다. 시험 삼아 넣기로 했다. 정말 비린내가 잡히나 안 잡히나. 넣었다. 그리고는 우리 두 사람을 보고 한번 먹어 보라고 했다. 먹었다. 역한 조미료 냄새가 등천을 했다. 비린내는 많이 잡혔다. 아, 그렇구나!
더 이상 도사님으로부터 배울 게 없었다. 자신이 전수를 해준 추어탕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했다. 조미료 냄새가 났다. 밥을 비운 나는 준비한 20만 원을 봉투에 넣어 도사님에게 드렸다.
한 수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몇 시간만에 사제지간의 관계가 끊어지고 말았다. 추어탕에도 급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날 그 도사님의 급수는 하급에 속했다. 왜냐하면 초자인 내가 끓인 추어탕과 맛이 같았으니까. 나는 시작부터 도사급이었다.
저 사람이 하루에 20만 원 받는다면 우리는 50만 원은 받을 수 있겠다.
다시 시작한 탕 연구. 대가리가 갈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연구와 실험은 계속 되었다. 그러기를 며칠 후 드디어 비린내를 잡았다. 조미료를 전혀 넣지 않고 비린내를 잡았다. 국을 먹은 우리 두 사람은 두 팔을 들고 만세를 불렀다.
만세!
만세!
만만세!
도노방 아지트. 지난 밤,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나 비오는 밤 풍경을 바라보며 마신 포도주.
그윽했다.
도노강. 자꾸 묻는다. 그 강이 어디에 있는 강이냐고. 체코 옆으로 해서 계속 가다 보면
이 강을 만날 수 있다. 그래도 못 만나면 아르헨티나를 직진하면 이 강을 만날 수 있다.
뒷이야기- 창 밖을 바라본다. 도노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잉어떼와 왜가리, 도노강을 가로 질러가고 있는 도노철도. 창 밖으로 불어 들어오고 있는 바람을 도노방 아지트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네 삶. 가치 있게 살다 가야 한다. 오후 두 시 반의 시계바늘. 태워야 한다, 라고 생각한다. 다 태워야 한다. 요즘 내 주제는 탕탕탕이다. 2007626도노방아지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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