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

녹색뉴딜이 뭔 이름이여!

오주관 2009. 5. 22. 16:02

"녹색뉴딜로 돈버는 놈, 이름도 안다
 오적? 요즘은 한 오백적쯤 될 거야"
[인터뷰-김지하 시인 ①] "평생 저주받을 각오로 '자살' 말렸다"
09.05.21 14:21 ㅣ최종 업데이트 09.05.21 21:01 김병기 (minifat) / 남소연 (newmoon)

  
그는 대선 직전에도 이명박 대통령 측근에게 "청계천해서 끝발 날렸다고 하는데 청계천과 대운하는 다르다, 운하하면 그날로 망하고 김지하의 주둥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한 달 있다가 더 설쳐서 <신동아>와의 인터뷰를 통해 조졌다"고 말했다.
ⓒ 남소연
김지하

"무슨 놈의 녹색. 지랄하고 앉아 있네. 아니 원자력 쓴다면서 무슨 놈의 녹색이야? 그리고 (4대강 정비사업을 하면서) 방글라데시에서 애들 데려다 쓸 게 분명한데 그게 무슨 놈의 뉴딜이야. 외국 노동자 구제책이야? 대한민국의 대학 나온 백수들 중에 거기서 모래통 질 사람이 어디 있어?"

 

지난 11일 일산 자택에서 만난 <오적>의 시인 김지하의 '독설'은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단서를 달았다.

 

"난 분노 없이 욕해. 이치가 있어야 욕해."

 

그러면서 김 시인은 현 정권이 내세운 이른바 '녹색'의 허구성과 이명박 대통령과 겪은 일화, 그리고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를 쓸 때 민주진영의 태도 등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죽음의 굿판' 이후 어려울 때 이명박 대통령이 1000만원 보내 와

 

그는 우선 "녹색뉴딜 해서 돈 버는 놈, 한 23명의 이름까지 안다"면서 "아이들 앞에서 대통령 그만두면 녹색운동가가 되겠다고 말했다는데 웃기는 소리다, 그리고 돼지독감(신종플루-편집자주)으로 다 죽게 생겼는데 마스크 쓰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무슨 놈의 녹색뉴딜이냐"고 일갈했다.

 

그는 대선 직전에도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에게 "청계천 해서 끝발 날렸다고 하는데 청계천과 대운하는 다르다, 운하 하면 그날로 망하고 김지하의 주둥이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한 달 있다가 더 설쳐서 <신동아>와 인터뷰를 통해 조졌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를 <조선>에 게재한 뒤 "변절자 소리를 들어가면서 12차례에 걸쳐 정신병원에 들락거렸어. 내가 어려울 때 이명박 대통령이 1000만원을 보내왔고, 노재봉과 박홍 신부도 깃발을 들고 나한테 왔다갔다 했다"면서도 "하지만 천하의 백수건달이 보은할 게 뭐 있나, 욕하는 것밖에 더 있냐, 그래서 욕을 시작했어, 정치가에게 쓴소리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언론을 통해 대운하를 하지 말라고 욕을 했더니) 장모(고 박경리 여사)가 돌아가셨을 때 나산병원에 문상을 왔더라고. 대통령 된 뒤지. 꺼떡하면 '장모가 우리나라 농업을 살리려면 물길을 열어야 한다'고 얘기하는데 장모는 그 얘기 한 게 아냐. 그런 것도 괘씸한데...

 

대한민국은 예의지국이야.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문상을 와서 상주인데 나한테는 눈 하나도 안 줘. 향 피우고 인사하고 가버려. 상주한테 '얼마나 서러우십니까?' 한마디 하는 게 조선의 인심이야. 그것도 모르면서 대통령을 해? <신동아>를 통해 자신을 쳤다는 것 때문이겠지. 그래서 내가 (장례식장에서) 나가는 것을 보고 옆에 있는 사람한테 '쟤가 누구야? 대 뭐라는 사람 말이야'라고 큰소리로 말했는데, 그런 사람들은 귀가 자기 보호용으로 발달해서 듣기 싫은 소리는 안 들어."

 

  
김 시인은 이번에 낸 산문집에서 "오적을 위시해 젊은 시절에 쓰다만 우스꽝스런 풍자시를 다시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밝힌 바 있다.
ⓒ 남소연
김지하

하지만 김 시인은 이명박 정부에 대해 '독재'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경계했다. 이에 대해 그는 "독재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돼, 과하다는 뜻이 아니라 무책임해"라며 "독재라는 말처럼 무책임한 말이 없기 때문에 잘못하고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딱 짚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제는 '독재'라는 말로는 대중은 꿈쩍 안 한다"면서 "어디를 쳐야 할지 궁리하지 않고 만날 와글와글하고 명동성당에서 미사만 하면 다인 줄 안다, 토인비가 제일 경계한 게 미메시스, 즉 반복이고 자기모방인데 (진보진영이) 또 자기모방을 하면 안 된다"고 일축했다.

 

김 시인은 "국운이 하도 좋아서" 이명박 대통령이 최고의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최고의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어. 그것을 인정해야 해. 어떻게 하면? 오바마와 손잡고 원만한 중도주의 채택하고, 북한에 투자하면 돼. 경의선 연결해서 유라시아 투자로 나가고 사상적으로 주체를 동학적으로 수정해야 해."

 

이명박 대통령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목숨이 달렸지. 잘못하면 죽어. 죽는 게 아니고 망해. 현 정권은 CEO 집단인데, 한국 CEO의 조국은 미국이야. 어떻게 오바마 말을 거슬러? 까불지 말라고 해."

 

이번엔 육적을 쓰려 했지만...

 

김 시인은 "(이명박 정권은) 우선 촛불부터 존중하고 받아들이면 살고, 밟아 끄려고 하면 혁명 터진다"면서 "제일 골치 아픈 게 현대에서 문화혁명이야. 68혁명을 봐. 공산당 기관지에 불질러 버리잖아. 벽에다 '상상력이 정권을 잡아라'라고 썼잖아. 상상력 없는 사람들은 정치하지 말라는 얘기야"라고 말했다.  

 

김 시인은 이번에 낸 산문집에서 "오적을 위시해 젊은 시절에 쓰다만 우스꽝스런 풍자시를 다시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밝힌 바 있다. 김 시인이 <오적>을 썼을 때의 나이는 28세. 무려 40년이 지났다. 김 시인은 다시 풍자시를 쓸까?

 

"이번엔 오적이 아니라, 육적을 쓸려고 했어. 그런데 내 나이가 올해 69세야. 나야 우당탕하는 것을 좋아해서 신나지. 그런데 우리 맏아들이 36살, 작은 아들이 29살이야. 장가갈 날이 멀지 않았어. 그럼 처갓집에서 뭐라 할까. 와~ 욕쟁이 아들? 그리고 내 풍자시가 당신들 알다시피 무섭잖아. 찢어버리잖아. 오적도 아니고 육적이라면. 우리 얘들을 봐서라도 좀 젊잖게 늙자고 생각했어. 나라를 위해서는 미안하지. 그런데 요즘은 한 '오백적'쯤 될 거야. 도적들이."

 

"평생 저주받을 각오하고 자살 말렸다"

김지하가 말하는 '죽음의 굿판'... "징그러워서 아직도 그 글은 안 봐"

  
"난 그 당시에도 환상에 시달렸어. 이른바 학생들이 황천을 못 건너는 거야. 모래밭에서 뒹굴고 악쓰고 가슴을 쳐. 그럼 내가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죽지 말라고 하는 거야."
ⓒ 남소연
김지하

지난 11일 김지하 시인의 일산 자택에서 3시간여의 인터뷰를 마치고 현관을 나서기 직전 기자가 한마디 던졌다.

 

"1991년 분신정국에서 <조선일보>에 게재한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글로 인해 변절자 소리를 들었는데, 이제 후배들과 화해하셨다고 보십니까?"

 

그는 갑자기 "그 말을 해야 한다"면서 다시 취재진을 거실로 끌었다. 그리고 김 시인은 30여 분간 격한 어조로 당시 그러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까닭과 그 후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쉽게 사과할 놈이야? 그런데 후배 10여 명이 몰려와서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내가 조동일과 함께 민중문화운동의 선구자라는 것을 깊이 감사하고 계승하겠다는 얘기야. 그러려면 선생님의 문화사상과 전망을 그대로 이어받을 텐데 장애가 생겼다는 거야. 자살문제로 인해 자기들의 말을 잘 안 받는다는 거지. 그래서 (후배들이) 어느 잡지랑 만나서 단 한 번만이라도 '안됐다' 정도의 한마디 해주면 그 뒤로 다 수습하겠다는 거야.

 

그 말을 듣고 <실천문학>에 그 얘기를 했어. (김지하 시인은 2001년 <실천문학> 대담 자리에서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쓰리고 그때의 상처가 젊은이들의 가슴에 생각보다 더 아프게 새겨진 것 같아 유구무언'이라고 사과했다.) 그런데 그 뒤에 후배들은 단 한마디도 없어. 왜 이런 약속은 안 지키는 거야. 이래서 내가 젊은 놈들 안 만나겠다는 거야.

 

나도 학생시절 4.19 전후해서 3번 자살하려고 했어. 김정록 선생(1982년 작고. 전 서울대 미학과 교수)이 노자 <도덕경>을 읽어보라고 해서 그걸 읽고 세상이라는 게 생각에 따라서는 허무도 됐고... 죽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어. 그런데 당시(1991년) 서울대 정신과 의사이자 칼 융 전공자인 이부영 박사가 나한테 '지금 정국 어떠세요'라고 먼저 묻더라고. 그래서 난 '말려야 할 텐데'라고 말했어.

 

그러니까 이 박사는 '그럼 말리세요. 학생들 사랑한다면 말리세요. 하지만 자살을 말리면 평생 저주받습니다. 그걸 각오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말려야 하느냐고 물었지. 그러니까, 이 박사는 '대중지를 이용하십시오. 자살을 앞둔 사람은 조그만 사람의 조그만 목소리는 안 듣습니다'라고 말하더라고.

 

그 당시 제일 잘나가는 대중지는 <동아일보>였어. 그런데 <동아일보>에는 내 자서전인 <모로 누운 돌부처>가 일주일에 한 번씩 전단으로 나가고 있었어. <동아일보> 내에서도 그것 때문에 말이 많았어. '김지하가 함석헌이냐 위인이냐 성인이냐'. 김중배 국장이 애를 먹고 있을 땐데 말썽많은 글을 받아들이겠어? 그 다음이 <조선일보>야. 전화했더니 '어서 주십시오. 만세!' 그래서 보냈어.

 

난 그 당시에도 환상에 시달렸어. 이른바 학생들이 황천을 못 건너는 거야. 모래밭에서 뒹굴고 악쓰고 가슴을 쳐. 그럼 내가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죽지 말라고 하는 거야. 이부영 선생은 '얘기를 하려면 야멸차야 한다. 당신 마음은 이해하는데 그러면 안 된다고 쓰면 먹히지 않는다'는 얘기야. '니가 XX놈이 뭘 안다고. 밥이나 잘 처먹어, 돈이나 잘 벌어라고 얘기해야 한다'는 거야. 자살의 명분을 조금이라도 주면 꼭 죽는대. 자살하려고 하려는 사람은 이미 마음이 자살한 사람이라는 거야. 삶과 죽음이 그렇다는 거야.

 

그래서 그 글을 야멸차게 썼어. 기분이 나쁠수록 먹힌대. 하~ 그거 원. 지금까지도 그 글을 안 봐요. 징그러워서. 그런데 민족문학작가회의 후배, 00 패거리 등이 사방에서 전화해서 우리 마누라가 난리가 났어. 개새끼, 소새끼. 하지만 그 이튿날부터 자살자는 끝이야. 그럼 됐잖아. 김지하는 욕먹기로 각오했으니까.

 

아무리 굴욕스럽고 더럽더라도 살고 봐야지. 그리고 그건 정치적 자살 아냐? 선배로서 책임이 있잖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