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동역에서 만난 아이
퇴원 후 쉰다고 했는데,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다.
이 날도 3만 보를 걸었다.
그 이튿날은 도봉산 둘레길을 걸었고.
1만 5천보 걸었다.
윗입술 가운데에 물집이 두 군데 생기더니 입술이 당나발이 되어 있다.
어제도 오전에 1만 보를 걸은 뒤 몸이 션찮아 병원으로 직행했다.
그 날과 똑같이 어지러웠고, 몸에 힘이 풀려버렸다.
3만 보를 걸은 그 날 아침 토요일,
옆지기와 지하철 3호선을 타고
복실이를 만나러 갔다.
원래 미국에서 온 옆지기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그 친구의 친구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을 하는 바람에 약속이 뒤로 미루어졌다.
그래서 오후에 어머니에게 가기로 하고 복실이를 만나러 간 것이다.
지하철 3호선 압구정동역에서 만난 할머니와 어린친구.
할머니와 어디 가니?
롯데월드에 가요.
그래?
초등학교 다니나?
아니에요, 유치원에 다녀요.
할머니가 말했다.
어린데 탈 게 있나?
많아요.
아버지가 자유권을 사주었어요.
아, 그래요?
나는 어린애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었다.
너, 개그맨 허경환씨를 많이 닮았네.
그러자 노인석 자리에 앉아 있던 한완상 박사와 많이 닮은 분의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 압구정동 꼬마가 나에게 다가와 내 허리를 꽉 껴안는 것이었다.
이놈, 봐라.
처음 보는 나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내 허리를 껴안는 꼬마.
나는 속으로 아, 이놈이 사랑이 부족하구나.
나는 아이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니가 사랑이 부족하구나.
할머니가 나를 보면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엄마가 없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압구정동 아파트에 사는 중산층.
돈은 잘 벌어도 아이와 놀아줄 시간이 없다.
아이는 할머니가 키운다.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롯데월드 자유이용권을 주는 것뿐이다.
아이는 계속해서 내 허리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나중에 크면 할머니에게 충성을 해야 돼?
그 말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네.
하고 말했다.
오늘 롯데월드에 가면 5시간을 탄다고 했다.
나는 아이의 머리와 등을 계속 쓰다듬어주었다.
꼬마는 교대에서 내렸고, 내릴 때까지 내 허리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사라지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시 만난 복실이
오늘 아파트에 장이 서는 날이라 장을 좀 봐주고 나올게요.
그래라.
커피나 한잔 마시면서 기달릴게.
자판기의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옆지기로부터 문자가 왔다.
지금 나가요.
나와 일주일을 같이 산 복실이.
옆지기가 목줄을 쥔 채 나오고 있었다.
나는 복실이가 과연 나를 알까, 가만히 있었다.
졸래졸래 나오다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본 복실이.
복실이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복실이는 나를 향해 우다다 미친 듯이 뛰어와 안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낑낑 소리를 내면서 내 얼굴을 햝고 야단이었다.
압구정동 아이는 내 허리를,
복실이는 내 얼굴을 마구 껴안았고, 핥았다.
하, 복실이가 나를 알고 있구나!
그 옛날, 동네의 험한 개들도 내가 다가가 워리, 워리, 하고 몇 번만
불러주면 경계를 풀고,
그리고 꼬리를 내리면서 배를 땅바닥에 댄 채 항복, 하고 나자빠지곤 했다.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증오하는 사람들도 세 번만 만나 대화를 나누면
나에게 향한 증오가 사랑과 신뢰로 바뀌고
나중에는 충성! 이 되곤 한다.
나에게는 그런 DNA가 들어 있다.
대모산에 갑시다.
그러자.
데리고 가다 만난 동물병원.
한번 들어가 물어보자.
이게 피부병인지 피부염인지.
절차가 까다로웠다.
상담사를 거쳐 들어간 곳에서 다시 비밀방으로 복실이를 데리고 갔다.
잠시 후 복실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망치로 발바닥을 내리치나?
복실이가 나왔고, 원장이 설명을 했다.
결론은, 세 가지.
세밀하게 치료를 하는 것.
약을 먹는 것,
마지막 방법이 샴퓨로 씻은 뒤 깨끗하게 닦고는,
상처부위를 이 약으로 뿌리는 것.
동물병원의 에어컨이 시원한지 배를 대고 엎드려 있는 복실이.
3만 5천 원.
부르는 게 값이다.
젊은이들은 3천원짜리 짬뽕을 먹고,
개들은 18000원짜리 보양식을 먹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한 눈에 품위와 품격이 느껴진 고양이.
버려진 고양이라고 했다.
이놈도 나에게 다가와 고개를 내밀었다.
애정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아이였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이 사람이 자기를 진짜 좋아하는지를.
복실이와 헤어지다
대모산에서 두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마음껏 뛰어놀았다.
옆지기는 짧은 바지를 입고 나와 산모기에게 여덟군데 물리는 영광을 안았다.
아파트 앞에서 복실이는 옆지기와 들어갔다.
적응이 되었는지 복실이가 앞장을 선 채 졸래졸래 갔다.
나는 마지막으로 복실이를 불렀다.
나를 보고 복실이가 다시 뛰어왔다.
어, 주인님이 안 오시네?
나는 복실이의 머리와 몸을 쓰다듬어주고는 보내주었다.
그래, 가라.
그리고 월요일, 나는 재발이라는 복병을 만나 병원으로 직행했다.
과장이 그랬다.
몸을 너무 학대해 생긴 병입니다.
릴렉스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쉬십시오.
3만보나 15천보는 운동이지, 쉬는 게 아닙니다.
벌을 받고 나왔다.
약도 일주일치 받아 나왔다.
줄 위에 서 있는 광대가 있다면,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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