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서울극장에서 버닝을 보다

오주관 2018. 5. 23. 13:12



어제 사월초파일, 서울극장에서 옆지기와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보다


우리가 밀양을 언제 보았는지 기억이 까마득하다. 오랜만에 이창동 감독이 만든 버닝이 칸국제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았다. 황금종려상은 놓쳤지만 국제영화비평가연맹(피프레시, FIPRESCI)상을 수상하며 그 이름을 이어갔다. 우리가 서울극장을 선택한 것은 다른 영화관보다 좌석이 넓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이렇게 널널하게 앉아 영화를 볼 수 있는 극장에 관객들은 왜 많이 오지를 않을까? 분석이 필요하다.


비어 있는 1시간, 책을 읽다


옆지기는 기초화장품 두 개를 산다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옆지기가 가지고 온 책을 보았다. 인간은 태어나는 그 시간부터 생로병사의 길을 걷는다. 짧게 살았든 길게 살았든 남는 건 하나, 어떻게 살았느냐, 이다. 그것이 개인의 역사이다. 법정 스님은 말년에 폐암으로 삶을 마감한다. 법정스님의 간다, 봐라, 라는 책은 소설이 아닌 산문집이라 어느 페이지를 읽어도 상관이 없다. 펼쳐 읽는 순간 글에서 향기가 맡아지고, 담백하고, 깨끗하고, 그리고 맑다.


법정스님의 주제는 '무소유'이다. 소유하지 않음으로 해서 이 세상을 품는다. 소유와 무소유가 이렇게 우리 인간의 삶을 갈라놓는다. 우리 모두는 오늘도 무엇인가를 소유하기 위해 피똥을 싸며 골골 고군분투를 한다. 소유는 어쨌든 집착이다. 집착에는 그리고 두 가지가 있다. 정신과 물질. 정신의 반대인 물질이라는 집착 때문에 개인이든 사회이든 국가이든 전부 진흙탕에 빠진다. 이명박과 박근혜, 그리고 몇몇 대기업 오너들이 벌인 짐승 같은 갑질을 보라. 그들에게는 삶에서 나오는 그윽한 향기가 없다. 그들의 공통점은 미래는 보지 않고 여기, 앞만 볼뿐이다. 한마디로 당달봉사다. 석가와 예수의 정신인 내가 아닌 이타를 실천하지 못한 망나니이기도 하다.



버닝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버닝이라는 영화가 주는  메시지


세 젊은이들의 삶과, 그들이 벌이는 미스터리. 이 창동 감독은 그 주제를 보여주기 위해 메가폰을 잡았을 것이다. 내가 본 버닝은 조금 다르다. 뿌리가 뽑힌 부평초 같은 세 젊은들의 절망과 좌절, 그리고 분노를 보았다. 뿌리가 뽑힌 자들에게 미래와 희망이 있을 리 만무이다. 벤은 포르쉐를 몰고 다닐 정도로 놀고 먹는 부자다. 종수의 고향 친구인 해미는 카드빚도 못 갚는 가난한 아가씨다. 택배 일을 하는 종수 역시 뿌리가 뽑힌 부평초다. 돈이 있는 벤도, 가난한 종수와 혜미도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떠도는 유령이다. 그 세 사람의 삶 자체가 힘을 빼면서 소름끼치게 만든다. 종수와 해미가 창문을 통해 자주 바라보는 남산타워. 그 남산 타워 밑 방 한 칸짜리에 살고 있는 해미. 날개가 없는 그 두 사람은 결코 날지 못 한다. 자본주의, 그리고 물질만능의 사회 이면에 드리워져 있는 어두운 그늘. 이창동 감독은 몇몇 메타포를 이용해 우리 사회와, 어두운 청춘들의 삶과 미스터리를 희미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일본소설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이라면 문제는 조금 달라진다. 헛간을 태우다에서처럼, 이창동 감독도 삶과 일탈, 그리고 여기가 아닌 저기를 갈망하는 자유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쨌든 뿌리가 뽑힌 젊은이들이다 보니 삶 자체가 지루하다. 주제가 없고, 치열함이 없으니 생활 자체가 지루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버닝이라는 영화는 압축미는 없고, 길다. 젊은 청춘들은 그나마 버닝이 주는 메시지와 문제점을 파헤치기 위해 인내심을 가지고 보겠지만,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는 버닝은 긴 엿가락처럼 하품을 내뿜게 만드는 지루한 영화이다.



버닝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두 사람의 단역배우


이 영화에 나오는 두 사람의 단역배우가 있다. 죄수복을 입은 종수 아버지. 대사 한 마디 없는 칙칙한 그 사내는 바로 최승호 MBC사장이다. 아마 이 영화를 찍을 때는 뉴스타파에 있었을 때이지 싶다. 영화 속의 그는 중학교 시절 전교에서 1등을 할 정도로 머리는 비상하지만, 사회성은 빵점이다. 동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그의 독불장군 아집 때문에 또라이로 통한다. 그래서 결국 싸움이 벌어졌고, 폭행과 기물파손죄로 구치소에 갇혀 재판을 받고 있다. 죄수복을 입은 돌부처 최승호 씨가 나를 내내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문성근 씨. 그의 사무실에서 종수를 만난 그는 꼬은 한 쪽 다리를 달달 떨면서 종수와 대화를 나눈다.


'무슨 소설을 쓰는데?'

'아직... 정해진 게 없습니다.'

'그래?'

'네.'

'그럼, 네 아버지를 그려, 네 아버지가 또라이잖아. 소설로는 딱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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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의 마지막 장면


종수는 아무도 없는 마을 벌판에서 벤을 죽인다. 그리고 벤을 포르쉐 운전석에 집어넣고 신나 한 통을 차 안에 다 뿌리고는 라이터로 불을 지른다. 잠시 후 활활 타오르는 포르쉐. 그 마지막 장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버닝의 메타포이면서 우리가 그릴 수 있는 상상력, 그리고 메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