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우리 두 사람이 찾은 인수봉. 인수봉 아래 대피소에서 바라본 인수봉, 그윽했다. 수도 서울에 이런 그윽한 산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세계 어디를 가도 그 나라 수도에 이런 그윽한 산은 없다
지난 목요일 오후, 형님 집에서 밥을 먹었다. 상 위에 올라온 반찬을 보니 생미역과 된장이 있었다. 나는 그렇다면, 하고 미역과 된장으로 밥을 비워 나갔다. 나는 쌈이 있으면 행복한 사람이다. 어릴 때 즐겨 먹은 그 음식이 어른이 되어도 변함이 없다. 나는 정말 등심이나 안심을 잘 모른다. 어디 먹어보아야 알 지. 어릴 때 쌈과 해초, 그리고 바다 고기를 엄청 먹었다. 해서 지금도 쌈이라면 바싹 다가앉는다. 그러니까 된장에 쌈이 있으면 밥 한 그릇을 즐거운 마음으로 비운다.
미역에 밥 한 숟가락, 그리고 된장. 꿀맛이었다. 특히 매운 청양고추를 넣고 끓인 된장이 일미였다. 한 그릇 반을 배우고 나자 배가 그득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꾸 배가 나와 걱정인데 대책 없이 밥을 먹다 보니 사장 배가 되어 있었다. 해서 걸어가자, 하고 집을 나와 공원을 걸었다. 그리고 동네를 지나 육교 위를 걸어가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석양이 아파트 너머로 지고 있었다. 강에는 물오리들이 힘찬 날갯짓을 하며 체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제 머지않아 자기 고향으로 날아갈 것이다. 몇몇 오리들이 궁뎅이를 하늘로 향한 채 열심히 물이끼를 뜯어먹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휴대폰을 열자 정교수였다.
“여보세요?”
“형님, 접니다.”
“그렇지 않아도 내일 대포 한잔하려 했는데.”
“그래요.”
학교라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한잔하면 안 됩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고 하면서 나는 며칠 전 개업을 한 지리산을 이야기하면서 그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한 시간 후에 도착하겠다고 했다.
강에는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강추위가 몰아친 겨울에는 코배기도 안 보이던 사람들이 날이 풀리자 굳어진 뼈마디를 풀기 위해 운동복 차림으로 헛김을 열심히 내뿜으며 다리품을 팔고 있었다. 내 배도 운동 부족에서 온 것이다. 70킬로가 턱 밑에 와 있다. 빼기는 빼야 한다. 나와 있는 배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집어넣어야 한다.
육교를 내려와 둔치를 건너가는데 내 앞으로 더운 김을 내뿜으며 코뿔소가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일, 이 년 달린 폼이 아니었다. 순간 부러웠다. 모르는 사람은 모르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지옥과 천국의 그 달리기를. 엄청 고통이 뒤따른다. 숨통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고통, 그리고 천근만근 무거워져 오는 몸. 그러니까 달리기는 고통이다. 하지만 고통 그 끝에 찾아오는 희열이 있다. 엔도르핀. 섹스 후에 찾아오는 사정은 저리 가라다. 그 맛에 죽을 둥 살 둥 달리는 것이다.
집에 돌아온 나는 이빨을 닦고, 그리고 얼굴을 씻고는 집을 나갔다. 사거리에서 혹시나 하고 전화를 했더니 역에 도착했다고 했다. 나는 “1번 출구 오른쪽으로 나와 큰 빌딩을 보고 오너라.” 라고 말하고는 핸드폰을 닫는데 저만큼에서 손가방을 든 정교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채권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술을 혼자 다 마셨나. 어차피 술값은 술을 한잔이라도 더 마신 사람이 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사회가 된다.
나는 채권을 데리고 지리산 속으로 들어갔다. 서 사장이 우리 두 사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우리는 탁자를 지나 방에 올라갔다. 그리고 자리를 잡고 앉자 서 사장이 다가왔다. 서 사장은 이 건물의 주인이기도 하다. 건물주가 건물의 가장자리에 지리산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장사를 하고 있다. 15평정도 될까. 어쨌든 사십 중반인 서 사장은 이야깃거리가 많은 사람이다.
그는 스물여섯살에 강남의 60평 아파트에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대기업에 들어간 그는 입사 7년 만에 부장자리에 올라 그 그룹의 회장님을 모시고 오대양 육대주를 다니며 돈벌이에 자신의 전부를 바쳤다고 한다. 돈도 좀 벌었다고 한다. 그런데 돈을 벌면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죄를 지었다고 한다. 그 즈음 오로지 돈밖에 모르는 그에게 부인이 브레이크를 걸었다고 한다. 돈이 전부는 아니다. 인간의 가치는 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은 당신을 이 사회와 격리시키는 외길이다. 그날부터 그 메시지가 계속 그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소유와 존재의 그 화두에서 갈팡질팡 싸움을 벌리던 그는 그 경계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진지하게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문제의 현장에서 답을 구한 그는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다. 홀가분했다고 한다. 경쟁의 바다에 사표를 내던진 그는 그 길로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 고장 난 몸과 정신을 다스렸다고 한다. 이제 남은 꿈은 가난한 무의탁 노인들을 모실 복지회관을 만드는 게 마지막 꿈이라고 한다.
찹쌀로 빚은 막걸리와 지리산에서 공수해온 안주들이 탁자 위에 올라왔다. 봉알탕. 나는 처음 그 이름을 보았을 때 붕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붕알이 아니고 소뼈에 붙은 살이라고 하면서 남자에게 아주 좋습니다, 하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며칠 전 옆지기와 왔을 때는 셀레늄을 먹인 오리고기를 먹었다. 해서 오늘은 봉알탕에 막걸리를 시켰다. 서 사장이 직접 술을 가져왔고, 그리고 봉알탕을 가져왔다. 나는 정 교수를 서 사장에게, 서 사장을 정 교수에게 인사시켰다. 그러자 서 사장이
“교수님은 이미 봤습니다.”
설마, 하고 나와 정교수가 쳐다보자
“블로그에서 이미 봤습니다.”
아, 했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지리산 실내. 지난 여름 서 사장 혼자서 인테리어를 했다고 한다. 우리 두 사람은 저 사장이 돈이 없어 혼자 인테리어를 하는구나, 하고 상상을 했었는데, 정작 서 사장은 돈이 많은 부자였다 잠시 후 볼일을 보고 온 옆지기. 내가 술잔을 가지고 염불을 하자 옆지기가 내 대신 술 상무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탄력을 받은 술잔과 안주가 왔다 갔다 했다. 막걸리 한 되가 비자 정교수가 내 꿈을 터치했다. 궁금했던 것이었다. 서 사장도 슬그머니 옆에 앉았다. 나는 그들을 상대로 약을 팔기 시작했다.
“에 또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나라 영어교육은 실패 그 자체다.”
“......”
“저런 식으로 계속 해보아야 백년하청이다.”
“......”
“우리나라 영어교육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은
첫째, 영어교육정책이 잘못되었다.
둘째,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영어교육이 또한 잘못되었다.”
무슨 주제인지 신이 나 있다. 상을 보니 그득하다. 가운데 있는 것이 봉알탕이다. 남자에게 좋다고 한다. 이 집 안주는 전부 자연식이다. 조미료는 노! 자연과 정성이 주 재료다, 라고 서 사장은 힘주어 말하고 있다
내가 꾼 꿈은, 혁명이다. 그러니까 영어교육정책과 학교교육을 완전히 뒤바꾸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학자도 행정부도, 그리고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장사꾼도 못 꾼 꿈을 나는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을 이제 현실화시키려고 한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그린 그 프로그램대로만 운영이 되면 5년 안에 말문이 열린다. 정 교수와 서 사장이 쥐죽은 듯 경청을 했다. 옆지기는 이미 그 내용을 말했을 때부터 일백 프로 동의를 한 사람이다. 현장에서 몸소 겪은 사람이다. 옆지기가 가능성이 있는 아이템이다, 라고 거들었다. 서 사장이 정 교수를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보통 남편 분들이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부인들은 대부분 말리는데, 형님은 아니네요.”
라고 하자 정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형님, 한번 밀고 나가보십시오. 가능성이 보입니다.”
“암마, 있고말고.”
정 교수. 학생회장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감옥에 몇 번 갔다 온 이력을 가지고 있다. 학교로 복귀하자 총장이 불러 “자네, 미국에 가 공부하고 오게.” 라고 했다고 한다. “싫습니다.” 라고 했다. 이해가 갔다. “그렇다면 일본에 가게.” 그래서 히라까나 하나 모른 채 일본에 간 그는 그때부터 온몸으로 일본어를 배우면서 공부를 해 학위를 따 돌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언어에 관심이 있고, 따라서 내 아이템이 궁금하기도 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정부분 도울 일이 있으면 돕겠습니다, 라고 힘을 실어주었다. 정 교수의 궁극도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순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정 교수도 내 손을 들어주자 돈벌이에 남다른 재주를 가지고 있는 서 사장이 엄청 궁금해 했다. 어떤 아이템이 떠오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일에 매달린다고 한다. 아니 사투를 벌린단다. 해서 풀려야 다음 일에 매달린다고 하는 서 사장.
“정말 궁금하네요.”
그러는 가운데 찹쌀막걸리가 다시 탁자 위에 올라왔다. 세 되 째다. 나는 잔을 옆으로 밀었다. 얼마 전부터 내 몸이 술을 거부했다. 소주도 안 받고 막걸리도 안 받는다. 좋은 징후인 것 같다. 이제 술에서 졸업을 하고 남은 시간 돈이나 좀 벌어보소. 그것도 폼 나게, 라고 내 몸이 말하는 것 같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했다. 이 무슨 지랄인가. 은퇴를 해 여행이나 다닐 이 나이에, 내 정신과 몸을 다시 한번 살벌한 삶의 현장 속으로 끌고 들어가야 하니.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아직 내가 젊다는 것이다. 내 몸과 정신은 지금도 서른여덟이다. 그 젊음이 내 밑천이다. 그래, 이 젊음이 가기 전에 불을 한번 피워보자. 어쩌면 마지막 불일지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가게를 넘긴 그날부터 나는 양미간을 잔뜩 좁힌 채 머릿속에 들어 있는 저장물을 꺼내 조립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두 번 실패를 했으니 세 번째는 실패가 없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내용물이 영어였다. 때를 잘 만난 것이다. 인수위의 ‘오륀지’ 가 거들었고, 이명박 대통령이 마른 장작에 불을 확 붙이게 만들었다.
아니다. 나는 옛날부터 우리나라 영어교육을 정면으로 비판해온 사람이었다. 영어만 생각하면 화가 난다. 왜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기이일~게 교육을 받고도 버버리밖에 안 되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나? 몇 년 전, 중국 칭다우에 갈 때, 나는 서점에서 중국어 교본을 한권 사 일주일을 보았다. 그리고 갔다. 가서 중국인들과 부딪쳐보니 통했다. 알아듣는 것이었다. 하, 신기했다. 제일 신기했던 것은 어느 백화점 안에서 설사를 만나 그곳 점원에게 다가가 화장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가르쳐주었다. 설사는 외상이 없다. 초를 다투는데, 그 초에서 나는 해방이 되었다. 나를 구한 것은 내 중국어 덕이었다.
내 꿈은 아직 꿈에 불과하다. 나는 생각한다. 그 꿈이, 꿈이 아닌 현실이 되는 그 길이 얼마나 지난하리라는 것을. 상상을 초월할 벽과 난관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고 내 생명을 앗아가는 지뢰일 수도 있다. 그 지뢰밭을 무사히 건너갈 수 있느냐, 없느냐 는 순전히 나에게 달려 있다. 재수가 나쁘면 건너가다 죽을 수도 있다.
덩달아 나도 신이 나 있다. 5년 후에 이 나라 5백 대 재벌 속에 내 이름이 등재되어 있으려나...
하지만 나는 믿는다. 나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아직도 꿈이 있고, 그리고 끈이 있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내 자신에게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I Can Do it"
나는 생각한다. 내 꿈은 나를 초월해 우리 모두를 구원할 프로그램이다. 물론 소수 상위 층의 아이들은 지금의 영어교육으로도 충분히 소화를 시키고, 그리고 말문을 열 수 있다. 그들에게는 지금의 공교육과 사교육으로도 충분하다. 부족하면 미국이나 캐나다로 갈 수도 있다. 그래서 채울 수가 있다.
하지만 많은 아이들은 그것이 아니다. 경제가 밑받침되지 않으면 언감생심이다. 내 꿈은 한 마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흔아홉 마리에 있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그리고 큰 돈을 들이지 않고 접근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내 작은 바람은, 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는 아이들을 보는 것이다.
자금은, 그 다음 문제이다.
뒷이야기- 우리나라 영어교육을 정면으로 비판한 나는 그러나 버버리다. 그래서 더 화가 치민다. 길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입이 터질 것 같으면서 오물오물 안 터진다. 그때마다 혈압이 치뻗는다. 그리고 그 화두가 내 대가리 속에 골수가 되어 박혔을 것이다. 한은 풀어야 한다. 그래, 나는 반 버버리일지라도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는 말문을 열게 해 주자. 지금 영어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돈이 나라 밖으로 새 나가고 있나. 그렇다고 외국에 갔다 돌아오면 말문이 탁! 터지나? 터질 리 만무다. 쉽게 터지지 않는다. 그 답답함을 내가 해결해주고 싶다. 그뿐이다. 5년 뒤, 말문이 터지면, 나는 두 손을 높이 쳐든 채 목청껏 만세를 부르리라. 오모차베 만세! 만세! 만세! 2008313도노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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