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늙었네. 예전의 내가 아니다. 고민이 많은 지 얼굴이 어둡다.
솔밭집이라는 상호를 걸어놓고 장사를 한 지 세 달 만에 간판을 내렸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라는 노래 가 있듯이, 장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 골목에서 내 별명은 깡패였다. 도대체 내가 두려워 그 골목의 껄렁이들이 들어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터줏대감도 똘마니들도 슬슬 나를 피하는 것이었다. 내 가게에 오는 사람들은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진국이라는 소문은 너무도 더디게 퍼져나갔다. 실패, 라고 단정을 내린 우리 두 사람은 접기로 했다.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오르면 이곳에 와 국민 여러분, 저를 이 나라의 머슴으로 뽑아주시면, 조질놈들은 반다시 조지고 살릴 사람들은 반드시 살리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라고 외치고는 하야한다
마니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가게의 주 메뉴인 추어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마니아만 가지고 장사를 할 수는 없었다.
접자.
옆지기는 그날부터 부지런히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며칠 전 밤 12시. 찾았다고 했다. 어느 여 사장을 수행하는 비서를 찾고 있었다. 자격조건은 영어가 되고, 운전면허증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미국비자가 있어야 한다, 라고 되어 있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오면 이곳에 와 한 곡조 뽑는다. 그러면 솔밭공원의 개미들이 일제히 박수를 친다. 그 박수 소리가 북한산에 가 닿으면 백운대의 깃봉이 흔들거리는데 그 파장이 다시 내 콧등을 슬그머니 친다
“비자가 없어서 안 될 것 같습니다.”
라고 옆지기가 중얼거렸다.
“비자 내면 안 되나?”
“미국 비자 내기가 어려워요.”
“어쨌든 한번 도전해봐라.”
그 회사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 도전과 열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해서 그 사람의 도전정신과 열정을 앞머리에 장식을 하면서 소개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부쳤다. 다음날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내 고향 후배가 대장으로 있는 보험연수원. 한번도 가지 않았다
“내일 면접을 볼 수 있습니까?”
“네.”
“그렇다면 서류를 올리겠습니다.”
괜찮은 별장, 내 것은 아니다. 한번 살아보아야 할 텐데...
어제 아침 가게에 온 나는 책을 보면서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게가 마음에 든다는 여자가 나타나 가게를 둘러보고는 내일 계약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이다, 라고 약속을 했다. 여자가 나가고 나는 다시 책을 보았다.
잠시 후 나타난 정교수. 경희대에서 정치를 가르치는 정교수는 내 가게 마니아다. 우리 추어탕을 한 그릇 먹으면 하루가 행복하다, 라고 할 정도로 우리가 끓인 추어탕을 알아주었다.
우리 가게의 추어탕 마니아인 정 교수
지난 달 정교수는 5만 원을 끓고는 추어탕을 먹었다. 한 그릇에 3,900원이니 넉넉잡고 열 세 그릇을 먹어야 끝이다. 그런데 열 그릇을 먹고는 스톱했다. 추어탕이 바닥이 난 것이었다. 해서 이메일을 보냈다. 여차저차 세 그릇이 남았는데 남은 돈을 보낼 테니 계좌번호를 보내십시오. 그러면서 내 블로그를 소개했다. 답이 왔다.
나는 몸을 떨고 있는데, 정 교수는 이렇게 옷을 벗고 있다
“충분합니다. 두 분의 그 정성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정도입니다.”
라고 하면서 내일 가게에 오겠다고 했다. 홍어에 소주나 한잔합시다, 라고 하기에 그러자고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정교수의 손에 봉지가 들려 있었다. 홍어를 사 가지고 왔다는 것이었다. 하긴 그 가게에 가는 것보다 우리 가게에서 마시는 게 좋을 것이다. 조용하고, 아늑하고, 그리고 밤 말을 엿듣는 쥐가 없는 것이다.
고개 숙인 여인. 미안하이...
한 병.
소주 한잔을 건배했다. 안주로 홍어를 한점 먹었다. 콧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옆지기 이야기를 하면서 비자 이야기를 꺼냈다. 비자가 없어서 안 될 것 같다, 라고 했더니 그래요, 하면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했다. 그리고 여차저차 응급으로 처리를 좀 해라, 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교수 끗발이 추어탕 사장 끗발보다는 확실히 한 수 위였다. 다음 대통령과 한 고향인 나는 끗발이라고는 거시기 끗발밖에 없다.
즐겨 앉았던 벤치
두 병.
정교수는 386세대였다. 그날 밤 소주를 마시면서 그는 내내 ‘의미’를 역설했고, 나는 ‘주제’를 이야기했다. 이념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그의 삶 속에 지난날의 고뇌와 고통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리고 열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추어탕을 먹을 때와 소주를 마실 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었다. 정교수는 시대를 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소주잔을 연거푸 비웠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식당
세 병.
나는 탈 서울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형님 글을 읽어보니 서울과는 안 어울립디다.”
초와 분으로 짜여진 이 서울이 싫다. 아니 싫은 게 아니라 숨이 막힌다, 라고 하자 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저 멀리 북한산이 보인다, 아니다, 삼각산이다
네 병.
안주에는 젓가락이 가지 않고 소주잔만 부지런히 비우고 있었다. 나는 정말이지 이데올로기가 싫다. 그리고 이념도 싫다. 우리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공통분모는 이념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있다면 ‘어깨동무’ 라고 생각한다. 내 것이 내 것이 아니고 네 것일 때 어깨동무는 가능하다. 네 것도 네 것이 아닌 내 것일 때, 우리 모두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안을 수 있다. 깡술이 내 정신을 혼미하게 하나, 고개가 자주 꺾이면서 얕은 잠과 싸우고 있을 때 옆지기가 들어왔다. 정교수와 옆지기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필름이 끊기기 시작해 기억을 하지 못했다.
늘 이런 식으로 나는 밥 한 그릇을 비운다. 너무도 인간적이다. 나는 이날까지 꽃등심이 뭔지를 모른다. 어릴 때부터 마늘과 양파, 멸치를 즐겨 먹어서 거시기는 실하다
다섯 병, 그리고 맥주 한 병.
마지막 소주를 내가 많이 마셨다고 했다. 취했다. 새벽 한 시 반. 우리 세 사람은 가게 앞에서 헤어졌다. 정 교수는 집으로, 우리 두 사람은 택시를 잡기 위해 길 건너편으로 건너갔다.
뒷이야기- 그 다음날 하루 종일 나는 배를 끌어안고 뒹굴었다. 잘 때는 괜찮았는데, 자고 나서 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터져나가는 줄 알았다. 깡소주가 몸을 망치는 게 분명하다. 아침 9시의 약속을 오후 6시로 미룬 나는 물과 오바이트와 싸웠었다. 2008216도노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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