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천적들-설사
내 주급은 5만 원이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사과 반쪽을 먹는다. 그 전에 종합비타민과 비타민 C를 먼저 먹는다. 마지막으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나면 출근을 한다. 내 주급은 월요일 아침, 출근하기 전 빳빳한 현금으로 받는다. 5 4는 20, 이십만 원을 받는 월급쟁이다.
일주일에 두 번 일하고 받는다. 내가 하는 일은 일주일에 두 번 아이들을 상대로 ‘지금 당장 필요한 300문장’ 이라고 말을 훈련시키는 일이다. 내가 지금 작업을 하고 있는 오조영어나라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든 덤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잘 따라하는 아이들은 재미가 있고, 열정이 없는 아이들은 마르고 닳도록 해도 깔딱 고개를 못 넘어간다.
말을 강가에 끌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는 건 말이다.
지갑 속에 주급으로 받은 돈이 17만 원 정도 들어 있다. 눈도 코도 귀도 없는 게 썰물처럼 이상하게 잘 달아난다. 받을 때마다 목을 움켜쥐고 놓지를 말아야지 하고 어금니를 물지만 나갈 때는 술술 잘도 빠져 나간다.
13년 전. 담배와 술을 즐겨 피우고 마셨다. 하루에 세 갑 정도 담배를 태웠고, 소주 한 병을 비웠다. 그때의 소주 도수는 높았다. 한 병 마시고 나면 얼그리 취해 나도 돌고 세상도 돈다. 13년 전의 이야기다.
13년 후. 지금은 크게 돈 쓸 일이 없다. 귀한 돈이라 말도 못하게 아껴 쓴다. 요즘 작업을 마치고 길을 걸을 때 종종 속이 아플 때가 있다. 아파 아픈 것이 아니라 설사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변이 꾸뎅꾸뎅했는데 다시 술을 조금 마시기 시작하면서 장이 쿠데타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채식주의자가 술을 친구로 삼으면 안 되지! 아마 정신 차리라고 경고를 보내는 것 같다. 신호가 오면 내 눈은 바빠진다. 동서남북. 보이는 게 카페이다. 아담하고 고상한 카페들이 많지만 내 머릿속은 다른 곳에 가 있다. 대장과 소장은 카페를 찾는데 머리는 공짜 화장실을 찾는다. 들어가면 최하가 5천 원이다, 라고 중얼거리면서.
어제도 그랬다. 4시에 작업실을 나온 나는 골목길로 내 존재를 숨겼다. 집도 구경하고 고상하게 생긴 카페도 구경하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속에서 신호가 왔다. 아뿔싸! 나올 때 미리 보고 나올걸. 늘 그 생각을 까먹곤 한다. 참을 수 있나? 빠듯하다. 계산을 한다. 작업실 입구에 있는 화장실까지 갈 수 있을까? 대장을 지나 항문 그 부근까지 온 듯하다. 둘러본다. 화장실은 많다. 카페 문만 열고 들어가면 만사가 오케이다. 돈 5천 원이면 시원하게 설사를 해결할 수 있다.
설사는 인내심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머리다. 한사코 외눈을 한 채 다른 곳을 찾고 있다.
5천 원이 뉘 집 아 이름인 줄 아나!
이게 사달이다. 5천 원이 아까워 들어가지지가 않는다. 돈 때문에 타이밍을 못 맞추면 할 수 없이 똥을 팬티에 짤긴다. 한두 번 짤긴 게 아니다. 운이 좋으면 5천 원을 벌고, 운이 나쁘면 팬티에 짤기고. 오늘도 몸과 머리는 티격태격. 옆지기는 안타까워한다. 그냥 들어가 커피를 마시면서 볼일을 보세요. 이해가 안 되네요. 그게 태어나고 자란 그 근본이 달라 그렇다. 당신이야 신식교육을 받은 부모님 밑에서 자란 사람이고, 나는 거친 음식과 절약이 미덕이다! 라고 골수에 박히도록 세뇌를 당하면서 자란 촌놈 출신이 아닌가.
똥을 누기 위해 5천 원을 주어야 한다.
촌놈 출신들에게는 말이 안 된다. 어렵다. 사실 촌에서는 문제가 될 게 없다. 화장실을 못 찾으면 자연이 화장실이다. 바쁘면 아무데나 풀썩 주저앉아 볼일을 보면 된다. 종이가 없으면 풀도 있고 나뭇잎도 있다. 정 없으면 돌멩이로 해결을 하면 된다. 돌멩이 세 개면 끝.
나는 5천 원을 물리치고 돌아선다. 최대한 괄약근을 조이면서 보폭을 빨리한다. 운이 따라주면 안 싸고 재수가 따라주지 않으면 쌀 수도 있다. 오늘은 계산이 안 된다. 빨리 걸을수록 괄약근이 조금씩 벌어진다. 잘못하면 된통 싸겠는데. 사각이라 재수가 나쁘면 바지 밑으로 똥이 흘러내릴 수 있다. 삼각은 답답해 안 입는다. 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사각이 좋다.
걸으면서 호흡을 조심해야 한다. 지나개나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 안 된다. 배에 힘을 마음대로 주어서도 안 된다. 기침도 참아야 하고 방귀도 참아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방귀를 조심해야 한다. 설사에 방귀는 천적이다. 따따따! 하고 방귀가 터지는 순간 개판이 된다.
조심조심! 전방 백 미터. 클라이맥스가 막다른 골목에서 만난다. 허리가 접힌다. 보폭도 탱고에서 블루스로 바뀐다. 고지가 보인다고 빨리 걸으면 안 된다. 얼음 위를 걷듯 만사가 조심조심 안단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페에 들어갈걸. 5천 원이 사람 죽이네. 안 싸면 벌고, 싸면 절단이 난다.
전방 10미터. 나는 마침내 좀 머씨가 된다. 최대한 괄약근에 힘을 주면서. 시간은 변화다. 나이도 마찬가지다. 호랑이 이빨 빠지듯 몸 구석구석이 노쇠화 현상으로 몸살을 앓는다. 힘만 주면 착 달라붙곤 했던 괄약근이 이제는 말을 잘 안 듣는다. 흡! 하고 기압을 줘도 꽉 닫히지 않는다. 안면근육이 찌릿찌릿하다. 흡! 하고 눈을 부릅뜬 채 바람처럼 문을 밀고 들어간다. 없다. 안에 사람이 있으면 목을 잡고 끌어내어야 한다. 재빨리 안에 들어온 나는 허겁지겁 배낭을 멘 채 허리끈을 풀어 내리면서 후다닥 주저앉는다.
후!
5천 원 벌었네.
뒷이야기-5천 원 벌기가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 까딱 잘못했으면 쌀 뻔했다. 싸면 이만저만 체면이 깎이지 않는다. 그 불편함이 대단하다. 설사와 5천 원이 가끔씩 내 미래를 가로막곤 한다. 젠장!2010331도노강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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