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년 모월 모일, 평생 보아온 내 책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사를 할 때마다 따라다닌 그 책들은 나의 분신이기도 했다. 경주 분교에서 서울로 이사를 가면서 잠시 막내 누이 아파트 지하에 맡겨 놓았는데, 아파트 관리소장이 무엇에 홀렸는지 고물상에 헐값으로 팔아넘겨버린 것이었다. 주인의 동의도 없이. 정신을 차려 아차! 했을 때는 그 책들은 이미 파지공장에 실려 떠나고 없었다. 연락을 받은 나는 흐흐흐 하고 웃었다. 관리소장이 내 고등학교 후배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언젠가는 버리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누구 줘버려라!’
‘저 책 때문에 망할끼다.’
어머님이 책을 볼 때마다 탄식 아닌 탄식을 하셨다. 맞다. 운동중독증이라는 게 있다. 하루만 운동을 안 하면 몸과 정신이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 있다. 책도 마찬가지다. 하루만 책을 보지 않으면 정신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안절부절못한다.
지난 세월, 책 때문에 골병이 들었다. 구속도 그런 구속이 없었다. 50평생 책에 갇혀 지냈다. 집착과 분열이 나를 태웠고 얼게 만들었다.
노자, 장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노자를 읽고 장자를 읽었다고 내 생활에 혁명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노자와 장자를 몰라도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읽었다고 자유를 만나나? 안다고 자유와 악수를 하나? 아니다. 알면 알수록 정신과 몸은 노예가 되어갈 뿐이었다.
버리자!
자유를 만나자!
그런 내 불편한 마음을 읽었는지 그 후배가 어느 날 트럭을 불러 고물상에 몽땅 넘겨버린 것이었다. 노자와 장자를 몰랐기 때문에 그는 용기백배 돈키호테가 될 수 있었다. 모른다는 것은 경계가 없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경계와 벽의 연속이다. 관리소장은 내 생명에 새로운 기를 불어넣어준 은인일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은인이다.
지난 몇 년 책을 잊고 살았다. 책에서 멀어지자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했고 정신도 훨훨 날기 시작했다. 더 이상 분열도 없었다. 집착 역시 사라져버렸다. 내 의식을 싸고 돈 분열과 집착이 숙주를 잃어버리자 스스로 도망을 가버렸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더 이상 책을 잡고 있었으면 나는 아마 미쳐버렸을 것이다. 들어오는 포수는 있어도 나가는 포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내 방에는 50여 권의 책이 있다.
자유와 상상의 세계가 하루 종일 춤을 추고 있다
#1 에피소드 하나
책이 한 방이었을 때, 나를 찾아온 사람들은 신중했다. 방에 앉은 그들은 대체로 몸과 정신을 도사렸다. 공부를 한 사람도 얼어 있었고,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도 얼어 있곤 했다. 대화도 신중했다. 어떤 때는 정신이 얼어붙는 바람에 말까지 길을 잃어 갈지자를 걷곤 했다.
#2 에피소드 둘
책이 사라져 버리고 나자, 나를 찾아온 그들은 자유로웠다. 정신과 몸이 물을 만난 고기였다. 더 이상 남극과 북극은 존재하지 않았다. 더듬더듬 갈지자를 걷곤 한 언어가 청산유수가 되어 있었다. 변호사 뺨 칠 정도였다.
경계가 사라져버리자 그들과 나는 소통이 되었다.
소통은 자유를 불렀다.
莊子.
며칠 전 시내 서점에서 장자를 다시 샀다. 그 옛날 집착과 분열에 정신이 묶여 있을 때 나는 노자와 장자를 읽었었다. 하지만 그 때의 노자와 장자는 자유가 아닌 공포였고 구속이었다.
그 장자를 다시 잡았다.
이번 여름, 장자의 절대적 자유를 만나기 위해 그의 사상의 바다에 풍덩 빠져볼 생각이다.
고수들은 이 글에서 눈치를 챘을 것이다.
유가와 도가의 닮은꼴과 다른 점을.
뒷이야기- 누구나 절대적 자유를 꿈꾸지 않은 이 없다. 성경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라고 했다. 장자의 절대적 자유는 무와 탈이다. 앞의 자유는 수직관계 안에서의 일이고 뒤의 자유는 무와 탈에서 만날 수 있다. 이게 사실 골병들게 하는 사상이다. 노자 장자를 안다는 자체가 경계를 끌어안는 것이다. 이 여름이 끝나갈 즈음 다시 장자를 이야기하고 싶다. 2010719도노강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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