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아주머니는 우파네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여기 나온 분들은 전부 노랑개이들이네요?
예?
그렇잖아요. 좌파는 빨갱이! 우파는 노랑개이!
완벽주의자
그는 틈이 없는 사나이였다. 시인은 틈이 많았고 여유가 있었다. 술을 좀 마시면 나오지 말아야 할 육두문자가 자주 나오곤 했다. 담배도 독하게 태웠고. 그러나 후배 역사는 반대였다. 술도 노, 담배도 노. 술과 담배 때문에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나를 그는 괄호 밖의 사람으로 취급하곤 했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없다. 너무 맑고 밝아 그의 주변에 혁명적인 친구가 별로 없었다. 하루 일과가 학생들 가르치는 일과 자기 공부하는 일이 전부였다. 방 하나가 온통 책이었다. 고향에서 그와 나는 막상막하였다.
어느 해부터 날아오기 시작한 편지. 물론 전교조 때문에 목이 달아난 그는 편지 쓸 시간이 많았다. 그는 나를 상대로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세상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받은 편지. 한지에다 썼는데 길이가 1미터 정도 되었다. 점심시간에 보기 시작한 편지가 다 보고 나니 해가 지고 있었다. 내용 중에 한 부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위대한 정치가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바보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의 이야기
어디서 만났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 두 사람은 뜨거운 양철지붕 위에 선 고양이가 되어 포항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늘 하나 없는 정류장에는 줄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혹한 겨울에는 더운 여름이 좋지만 막상 이마가 벗겨질 정도로 더운 여름에는 여름이 싫다. 타는 태양을 피할 곳이 없었다.
더우면 불쾌지수도 높아진다. 그 때 길게 늘어선 사람들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사내들. 문신을 한 젊은이들 서넛이 새치기를 하는 것이었다. 앞에 서 있어야 앉을 확률이 높아진다. 뒤에 서면 개코나 30여 분 서서 가야 한다. 역사가 그들 앞으로 다가가더니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문신들이 역사 선생을 째려보았다. 그들의 표정은 어랍쇼, 한 주먹도 안 되는 인간이 뭘 믿고 이렇게 세게 나오시나? 아! 그는 그런 사나이였다. 160 정도의 키에 몸무게는 55킬로그램 정도. 순간 내 몸이 얼어붙었다. 만약 저 문신들과 싸움이 벌어지면 십중팔구 뒷감당은 내가 해야 한다. 오늘 잘못하면 눈티가 반티가 되겠네! 하, 어쩌자고 저런 인간들을 갈로. 한번은 시인이 날 지옥으로 보내더니 이번에는 역사가 또 내 몸을 쫄게 만드네. 나는 맞는 것을 극도록 싫어한다. 맞기가 싫어 싸울 때마다 공격을 하곤 했다. 어떻게? 눈 딱 감고 내 주특기인 헤딩이 들어간다. 상대의 멱살을 잡은 나는 순간 공중부양을 한다. 그리고 내려오면서 내 체중을 전부 실어 상대의 이마를 정면으로 박는다. 땅! 하고 박으면 십중팔구 상대는 아이고, 하고 땅바닥에 나뒹군다. 마치 김일한테 당한 것처럼. 나한테 공격을 받아 코뼈가 부러진 놈이 몇 있다. 나는 상대를 패보았지 맞아 본 일이 없다. 맞고 패는 싸움을 정말 싫어한다. 그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내린 정의가 몇 개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프로는 프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프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마추어다.
가슴이 뛰고 앞이 캄캄할 그 무렵, 야 이 씨발새끼 만수야!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류장 앞에 봉고가 한 대 서 있었는데 문신들 친구인 모양이었다. 이야, 댓길아, 하고 만수 일행들이 희희낙락 봉고 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상옥으로 간 그 날 오후
세 사람이 기아자동차 부품센터를 하고 있는 막내 후배 차를 타고 해발 8백 정도의 고지를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역사와 역사 친구 영어선생 그리고 나. 막내 후배 부품센터에서 만난 우리 세 사람. 막내가 말했다.
형님들, 오늘 오지 중에 오지마을을 한 번 구경시켜 드릴게요.
막내도 낭만을 아는 후배다. 낭만파들이 술과 담배를 좋아하듯이 그놈도 밤을 홀딱 지새며 옆동네에 살고 있는 친한 친구와 토론을 이어가곤 했다고 한다. 그것도 줄담배를 태워가면서. 좀 뭐라해주세요, 하고 후배 부인이 말했다. 내가 그랬다. 이놈아, 밤에는 자야 한다. 자꾸 낭만파 흉내 내다가 골로 간다. 내 경고를 무시한 막내. 아닌게 아니라 작년 봄에 픽 쓰러지고 말았다. 대구 갓바위에 갔다 내려오면서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대구 불로막걸리를 한 병 마시고 그가 입원해 있는 영남대학교 병원에 갔다. 그가 나를 보고 일어났다. 갠찮네! 나는 비틀비틀 걸을 줄 알았다. 형님 전화라 받았니더. 밖에 나온 우리. 말은 알아 듣는데 글을 못 쓰니더. 말만 하면 된다. 앞으로 과거시험 볼일은 없잖아. 불행중 다행인 것은 중풍환자 정회원은 면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를 한번 끌어안아주고 병원을 나왔다. 어쨌거나 고향에서 도서관 사업을 하면서 책을 만들어 낼 때 우리 세 사람은 열정을 가지고 그 일에 매달렸다. 고향 사람들에게 문화가 뭔지를 한 번 보여주자. 역사는 빠져 있었다. 아마 멀리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도서관의 주역들이었다. 도서관을 탄생시킨 주역들은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공부를 한 후배들이었다. 그들의 뜻이 모아졌을 때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 전 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가 하드웨어를 책임졌다면 소프트웨어를 책임진 사람은 나를 비롯해 후배들이었다.
800고지에서 차가 오도 가도 못한 채 멈추어 섰다. 귀가 먹먹했다. 안 가나? 날도 더운데 에어컨까지 먹통이었다. 내려서 차 좀 밀어야 되겠니더. 내려서 밀었다. 털털털, 이십 미터를 갔을까 차가 살아났다. 타소.
같은 지역이라도 상옥은 달랐다. 강원도 산골 마을에 온 기분이었다. 문명이 거세된 오지마을. 계곡의 물이 역사를 닮아 있었다. 봐라, 저 물에 고기가 있는지 없는지. 역사는 빙그레 미소만 지었다. 마을 사람들의 인심도 때가 묻지 않았다. 개발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개발 후에 변할 그 흉흉함을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지켜나 갈 수 있을까? 자본이 가지고 있는 가장 무서운 무기 중에 하나가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일이다. 자본의 최대 무기는 탐욕이다. 탐욕은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괴물이다.
서울에서 내려온 영어가 앉아 쉴 때 그런 이야기를 했다. 교감을 하기 위해 대학원에 가야 한다고. 역사가 얼굴을 찡그리며 형님, 말이 되는 소링죠? 차라리 나는 평교사를 하겠습니다. 쫄병이 존나? 안 좋아도 할 수 없니더. 교장과 평교사는 급이 다르다. 한마디로 친구 사이인데 한 사람은 교장 한 사람은 평교사이면 실력을 떠나 쪽이 팔리는 일이다. 학교에는 군자들만 모여 있나? 그 사회에도 인간말자는 많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을 쉽게 변하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완장이다. 완장만 차면 돌아버리는 게 우리 인간이다. 당장 교회를 가보라. 목사들 단상이 얼마 높은지.
수평이 아닌 수직에서 무슨 개뿔 평등이 있나?
그해 가을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나는 구룡포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후배 아이들에게 줄 과일을 사기 위해. 밤이 깊었나 점방의 셔터들이 내려져 있었다. 만만한 게 홍어좆이라고 싱싱한 과일은 없고 바나나밖에 없었다. 얼망죠? 이천 원이시더. 헐타, 하고 샀다. 비닐봉지를 가방 속에 넣은 나는 몇 시간 후에 닥칠 화는 생각하지도 못한 채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후배는 구룡포 항구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 연립에 살고 있었다.
후배 부인은 고향의 종합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녀의 매력은 눈이었다. 밤하늘의 별처럼 초롱초롱했다. 내 아지트나 다름없는 그곳에 갈 때마다 K선생은 밥을 새로 만들어 주었다. 지금은 내가 환경과 먹을거리에 전문가가 되어 있지만 그때는 그들이 나를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밥뿐만 아니라 반찬도 그렇게 정갈할 수 없었다. 맛의 고향은 정성이다. 정성이 들어간 밥상은 먹는 사람의 마음을 늘 기쁘게 만든다. 상을 물리고 나서 마시는 차 한 잔. 늘 녹차였다. 커피는 상것들이나 마시는 차지 양반들이 마시는 차는 아니었다. 녹차도 그냥 녹차가 아니라 다기에 담아 우려내는 전통 녹차. 마시면서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 했던가. 전교조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배경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학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정과 부패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리고 흑백논리만 가르치고 있는 잘못된 교육에 대해 입에 침을 튀기며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는 생각한다.
전교조는 전국의 부패한 선생들과, 잘못 가르치고 있는 흑백논리에 반기를 든 동학혁명만큼이나 신성한 미완성의 혁명이었다.
밤이 늦도록 이야기에 꽃을 피우다 아 참, 하고 나는 내가 산 바나나를 가방에서 꺼냈다. 내일 아침에 아아들 줘라. 바나나 껍질에 검버섯이 피어 있는 것을 본 후배가 화를 냈다. 형님, 정신이 있능죠? 와? 저걸 먹으라고요? 상했나? 한번 보소. 껍질은 저래도 속은 괜찮을 거로. 저 바나나가 어떻게 오는지 아능죠? 나야 모르지. 못 먹니더. 후배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예노. 마, 아까운데 우리가 묵자.
욕을 얻어먹어도 화가 나지 않은 것은 그의 진정성 때문이다. 화를 내면 오히려 내가 나쁜 놈이다. 참은 참으로 받아주어야 하고, 가짜는 화로 표현을 해야 한다. 그게 사람이다. 내가 잘못했다. 다음부터는 우리나라 사과 같은 거 사가 올게. 선생님, 잘못했심더.
그해 가을, 아니면 겨울
밤에 전화가 걸려왔다. 후배의 누이 동생이었다. 포항에 내려가면 청소년수련원에서 늘 만났다. 포항에 내려갈 때마다 나는 그곳에 가 운동을 하곤 했다. 천원만 주면 운동을 할 수 있다. 수련원에 가면 누이가 항상 운동을 하고 있었다. 마라톤에 미쳐 있을 때였다.
어느 해 여름에 갔을 때 운동을 마친 그녀가 선배님, 내일 회 사줄게요 했다. 그러면서 자기 핸드폰 번호를 말했다. 고개를 끄떡였다. 외웠습니까? 응. 그럼 한 번 말해보세요. 하하, 다시 한 번 말해봐라. 말했다. 뇌에 기합을 주면서 외웠다. 하지만 나는 다음 날 전화를 하지 않았다. 그러고 다음 해 여름에 갔을 때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그 다음 해에도. 어느 철강회사 상무이사 부인인 그녀. 아야, 미안하다. 건강하게 잘 지내제. 니도 포항 떠났나? 나도 이제 포항에 잘 안 내려간다. 몇 년 됐다.
전화기 속의 누이는 울고 있었다. 아, 했다. 대나무는 부러진다. 그 생각이 전광석화같이 떠올랐다. 풀은 어떤 강풍에도 부러지지 않지만 대나무나 소나무는 부러진다. 이럴 수가! 앞이 캄캄했다. 누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언니가 며칠 전 자진했습니다. 뭐, 뭐라고?
복직을 며칠 앞두고 일어난 일이었다. 당당하게 교문 안으로 들어가라. 부인도 당당한 자기 남편을 위해 한복까지 새로 맞추어 주었다고 했다. 위풍당당할 것! 절대 쫄지 말 것!
고향에서 만난 후배
내려갔다. 누이를 만났고 그의 집에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안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후배가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형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안아줄 수밖에. K선생이 앓았을 그 몹쓸 가슴앓이를 나는 모르고 있었다. 후배의 가슴앓이만 생각했지 그의 부인 K선생의 가슴앓이는 눈곱만큼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바보였다.
내 앞에 먼저 세상을 뜬 그들. 그들은 늘 자기가 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을 하곤 했다. 내 육촌 동생도 나를 만날 때마다 피곤해서 죽을 것 같다고 하소연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무시했다. 이 세상에 안 피곤한 사람이 어디 있노. 그날 밤에도 피곤해 죽을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간 동생. 다음 날 새벽, 그는 야근을 마치고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다 졸았는지 반대편 전봇대를 박고 죽었다. 그리고 새벽이면 담을 넘어 도둑고양이 모양 내 방에 슬그머니 기어 들어와 자곤 한, 한 살 아래 동네 동생 놈도 그날 밤 나에게 호소를 했다. 나하고 탁구 한번만 치자. 6월이었고 더웠다. 안 간다. 그럼 딸기 사줄게 가자. 안 간다. 더위 때문이었다. 두 번 나에게 빠꾸를 맞고 나간 그놈은 그날 밤 자기 집 앞 산에 올라가 목을 매고 죽었다. 성이 두 개였던 그.
다음 날 우리 두 사람은 그곳으로 갔다. 고향의 공동묘지. 반 평 정도 되는 곳에 묻혀 있는 K선생.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나라는 존재가 이것밖에 안 되나? 서울의 영어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받기만 했지 주지를 못했다. 서울의 영어도 나에게 늘 베풀었다. 그의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밤에 자기 남편을 찾는 전화가 걸려오면 내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나에게 전화가 걸려오면 늘 나가라고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나가는 남편에게 용돈까지 주면서 부탁을 한단다.
선배님 만나면 술도 사 드리고, 헤어질 때 담배도 사 드리고 오세요.
나는 K선생의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알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어디론가부터 받은 정신적 고통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소리를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다) 그녀는 이미 가고 없는데. 3일을 후배와 함께 지내고 올라오는 내 마음은 지독하게 쓸쓸했다. 분명한 사실은
이제 이 세상 그 어디에도 K선생은 없다
가만히 보니 이 아저씨도 좌파네.
당신들은 노랑개들이고.
아저씨, 그만 가세요.
가는 건 오야 마음입니다.
어쨌든 가세요.
아주머니, 한마디만 하고 갈게요. 우리나라가 왜 강한지 아십니까?
왜 강한데요?
우리나라는 빨주노초파남보가 다 있기 때문에 강한 겁니다.
……
그래서 좋은 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
아주머니, 우가 어디 있고 좌가 어디 있습니까? 아시겠습니까?
사람이 늙으면 감정도 늙는지 마음이 이제 보살을 닮아간다. 옛날 같으면 절대 그냥 물러나지 않는다. 팔이 허공을 저었을 것이고 시인처럼 육두문자가 터져 나왔을 것이다. 어떻게?
야 이년아, 니 씹이 좌파다!
뒷이야기-그는 복직과 함께 고향을 떠났다. 돌전의 막내가 아마 고등학생이 되었을 것이다. 큰 아이는 대학생. 고향 후배 집을 찾을 때마다 장구를 만지며 노는 두 아들을 보곤 했다. 반골. 그래, 어른이 되면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한번 포항 그의 누이집에서 그를 만났다. 그날 내가 농담조로 이제 재혼해야지, 했다가 돌직구를 맞았다. 형님, 재혼이라니요? 그 이후로 나는 그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아마 수비수가 되어 그와 K선생의 분신인 두 아들을 튼튼하게 지켜주고 있을 것이다. 그래, 공격수는 수비수가 있기 때문에 공격이 가능하다. 늘 건강해라. 20121011도노강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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