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북한산 둘레길을 걷다

오주관 2012. 10. 22. 19:36

 

 

 

어제 일요일, 북한산 둘레길에 나섰다. 얼마를 걸었는지 모른다. 총 10여 킬로미터를 걸은 것 같다. 다리가 묵직했다. 막걸리 한 병과 밥을 비웠는데도 배가 허전했다.

 

 

 

 

 

 

노인이 엿을 팔고 있었다. 맛배기로 하나씩 주면서 흥정을 하는데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엿을 팔아보아야 남는 게 얼마나 될까. 미국인들을 보면서 옆지기를 떠올렸다. 당신이 미국에 가면 두 군데를 보여주고 싶어요. 하나는 뉴욕의 맨허틴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데쓰벨리. 뉴욕 맨허틴의 마천루를 보면 끝이 안 보이는 인간의 두뇌를 보게 될 것이고 죽음의 데쓰벨리를 보면 자연이 만든 광활함에 숨이 멎으면서 압도당할 거예요. 그와 동시에 머리가 지진을 만날 것이고 사고가 뻥 뚫리면서 엄청 확장될 거예요.

 

 

 

 

 

 

미래의 우리 자신들. 후손들은 이제 조상의 묘를 관리할 시간이 없다. 모르지, 일주일에 4일 근무체제로 들어가면 달라질까. 우리 인간의 삶을 위해 주 4일 체제로 가야 한다.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도.

 

 

 

 

 

 

 

 

 

이 지점에서 그분을 만났다. 칠십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분과 삼십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를. 트레이닝 복장의 노인이 계속 미국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미국은 정말 대국이야. 한국이나 일본은 끼어들지를 못해! 중국도 마찬가지야. 엄청난 대국이야. 어머니와 누님이 야야, 결혼해서 미국에 들어와 살아라. 살짝 내가 끼어들었다. 선생님, 미국이 크지요? 그럼요. 땅도 크지만 인간들 두뇌도 엄청 커요. 뉴욕 맨허틴에 가면 숨이 콱 멎습니다. 

 

 

 

내가 물었다. 안 사시고요? 아 예, 그런데 내가 살 곳은 아닙디다. 왜요? 일년 정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를 만났어요. 그 선배는 고시를 두 개나 패스했는데 미국에서 세탁소를 하고 있었어요. 만나 술을 한잔 하고 기분도 꿀꿀하고 해서 거리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데 아, 경찰차가 서더라고요. 큰일났다. 차에서 검둥이 경찰이 내리더니 눈을 부라리며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하, 겁이 났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검둥이가 나에게 다가와 다짜고짜 내 멱살을 쥐더니 손바닥으로 내 뺨을 죽어라 후려치는데,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줄 알았습니다. 원래 미국이 경찰국가입니다. 하, 정말 우리나라 정서하고는 하늘과 땅이데요. 미국사람들이 왜 질서를 잘 지키는지 아십니까? 그놈들 벌금이 어디 한두 푼이라야 말이지요. 미국이 원래 민주주의 국가가 아닙니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고. 어쨌든 만정이 다 떨어져 도망 오듯 한국에 왔습니다. 내가 그렇게 인종, 언어, 피부, 이념, 종교를 초월하라고 했건만 미국은 요지부동. 검둥이가 우리 유색인종을 얼마나 멸시를 하는지. 검둥이들이 그런데 흰둥이들은 말해 뭣하겠습니까? 결국 우리 누님이 와 벌금을 60만 원인가 내고 풀려났습니다.

 

 

 

너무 미국이라는 나라에 주눅들면 안 됩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따지고 보면 잡종국가입니다. 그래서 강한 나라가 된 것입니다. 미국인들의 뛰어난 DNA가 있고 한국인들의 뛰어난 DNA가 있습니다. 신도 우리 유색인들을 완벽하게 구웠다고 자찬을 하잖아요. 고기로 치면, 너무 설 구운 게 백인이고, 너무 구운 게 흑인이고, 갈갈하게 맞게 구운 게 동양인입니다. 동양인들을 석쇠에 구우면 소금를 찍지 않아도 간간한 게 먹을 만할 겁니다. 하하하! 두 사람이 웃었다.

 

 

 

이 지점에서 헤어졌다. 나는 좀 머씨처럼 바쁘게 그들과 헤어졌다. 머릿속이 복잡하면 무조건 걸어야 한다. 그러니까 나를 좀 내버려 두시오! 헤어져 다다다 산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이번에는 한 무리의 사십대 여자들이 단풍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나를 콜했다. 아저씨, 좀 찍어주소. 삼겹 오겹들이 행복해 미치겠다는 표정이었다. 주소. 찰칵! 나도 좀 찍어주세요. 찰칵! 저도 좀 찍어주세요. 망할, 이러니 전자가 떼돈을 벌 수밖에. 숨 좀 들이쉬시고! 흡! 오겹이 삼겹이 되고 삼겹이 사라졌다. 얼굴 좀 피시고! 하하하! 오케이, 찰칵. 순간이 영원을 결정한다고 했나. 사람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사진을 보면 감동을 받을 것이다. 헤어져 가는데 여자 하나가 불렀다. 아저씨, 시원한 쥬스 하나 드세요. 냉동고에 넣었다 가지고 온 포도쥬스였다. 갈증이 조금 가기는 갔다.

 

 

 

이 지점에서 노부부를 만났다. 칠십 중반. 노인이 아저씨, 도봉산역으로 가려면 이리로 갑니까, 저리로 갑니까? 이리로 가시면 됩니다. 아, 그래요. 네. 아니, 이 아저씨 조금 전 산 속에서 봤는데. 네, 맞습니다. 왔던 길을 또 가세요? 네. 안테가가 도망을 간 바람에 왔다갔다하고 있습니다. 나이든 양반이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뇌가 건강한 걸로 보아 소녀 때 공부깨나 한 모양이다.

 

 

 

여기서 둘레길 트레킹을 마감했다. 정자에 누운 나는 쿨쿨 잠을 잤다. 내 옆에는 늙은 여자분들이 커피를 끓여 나누어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한 무리의 사십대 여자들이 가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끼지를 못하고 있었다. 사이사이 나를 겨낭했지만 나는 모른 채 잠을 청했다. 삼겹오겹들이 끝내 나를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

 

 

 

 

뒷이야기-가을이 익어가는 산에 들어가 마음껏 걸었다. 걸으면 행복해진다. 걸으면서 나는 내 머릿속을 최대한 비웠다. 채우는 게 아니라 비운다. 비우는데 그 무엇인가가 자꾸 비집고 들어 오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가라, 잡것들아, 나는 그대들과 친구가 아니라네. 20121022도노강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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