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복, 그 언덕을 넘어
사나이로 태어나 할 일도 많지만, 길의 후반부에 나타나 나를 괴롭히고 있는 적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 가방은 이미 소금이 여러 해 배여 그 냄새조차 휘발되어져 버리고 없다. 좋은 가방이지만 너무 오랜 세월 메고 다닌 가방이라 고물이 된지 오래다. 그 가방을 메고 언덕을 오른다. 중복인지 말복인지 절기도 잊어버렸다. 분명한 건 너무 덥다는 것이다.
의리! 하나만 메고 다닌 그 배우는 요즘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인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다. 그는 방송에 나타나면 으레 의리! 와 함께 불끈 쥔 주먹을 들이댄다. 의리가 밥 먹여주나? 라는 말이 한 때 회자되었었다. 그 의리는 개보다 못한 의리를 말하는 것이고, 그 배우가 외치는 의리는 우리가 하루빨리 찾아야 할 사나이를 사나이답게 만드는 그 의리를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 의리가 지금 밥을 넘어 상종가를 치고 있다.
후,후,후! 언덕으로 올라가는데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인생 후반부에 찾아올 내 삶의 오아시스는 어디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 있기는 할까? 그는 어제 집에서 나와 버스와 지하철로 자신의 목적지까지 갔다고 한다. 그도 요즘 세상 보기 드문 지도자다. 그와 나는 어디서 어떻게 조우를 할까? 변방과 변방에서 그와 나는 어떤 한 점을 향해 가고 있다.
그와 나는 만나질까?
인쇄소, 복사집
사장이 계산기를 두드린다. 지금까지 내가 단골로 다닌 곳은 이대 앞 그 집이다. 다리를 약간 저는 그는 친절했고, 자신의 일에 열정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부근의 동업자보다 값이 좀 쌌다. 저도 통일에 조금 부주를 하고 있나요? 암요. 통일이 되면 분명 사장님 몫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날이 너무 더워 이번에는 이대가 아닌 성대로 방향을 틀었다. 이 집, 저 집을 두드렸지만 계산이 나오지 않는다며 잉크젯을 소개해주었다. 한 번에 찾아간 그곳에서 그는 오케이, 했다. 아주 깔끔하게 나왔다. 오늘 다시 그 집에 가 이것 5부 저것, 5부라고 하자 그는 계산기를 다시 두드렸다. 그리고 내일 아침까지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아니, 오늘까지 되어야 한다. 그럼 오후 5시까지 해놓을 테니 오십시오.
땀이 비 오듯 하는 언덕을 넘어
다시 언덕길을 걸어 올라왔다. 날이 독하다. 뱀도 이 시기의 뱀이 제일 독이 세다. 경주 분교의 그 살모사가 떠올랐다. 그 때도 오늘 같이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였다. 나는 40일째 분교를 분교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내가 그 분교에 짐을 풀었을 때만 해도 분교는 분교가 아닌 밀림이었다.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할 정도로 풀이 키 높이만큼 자라 있었고, 뱀이 많았다.
독사와의 만남
그 날도 나는 밀짚모자를 쓴 채 교실 앞 화단의 풀을 뽑고 있었다. 그 때는 담배를 태우고 있을 때였다. 땅만 보고 잡풀을 뽑고 있는데, 순간 손끝이 야리야리했다. 느낌이 이상했던 것이다. 순간, 나는 재빠르게 내 오른손을 공중에 들어 올렸다. 0,1초도 안 걸렸을 것이다.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면서 앞을 보니 살모사 한 마리가 내 손에서 불과 10센티 앞에서 몸을 튼 채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0, 2초만 늦었어도 살모사가 내 손을 물었을 것이다. 차도 안 다니는 오지마을. 만약 물렸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이고, 저 살모사놈의 새끼!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뒤에 가 혹시나 하고 준비해놓은 대나무를 가지고 왔다. 만약 그 때 놈이 도망을 갔으면 살았을지 모른다. 아니, 살려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그 때까지 놈은 양반다리를 한 채 혀만 날름거리고 있었다. 독한 놈! 나는 그놈을 뜨거운 양철지붕이 되어 있는 운동장에 데리고 와 그 때부터 내가 군대에서 받은 훈련을 재현했다.
우로 굴러, 좌로 굴러!
앞으로 포복 , 뒤로 포복!
34도 정도 되는 뜨거운 운동장에서 그렇게 10번 정도 반복을 하자 놈이 혀을 내물더니 배까지 뒤집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나 죽네! 하면서 기진맥진했다. 조금 전까지의 그 위풍당당함은 어디로 도망을 가고 지금은 완전히 양아치로 변해 있었다. 그 때 나는 인격이 좀 덜 닦인 터라 놈을 그렇게 장렬하게 떠나보냈다. 만약 반대로 내가 그놈에게 물렸으면 그 마을의 허풍쟁이 젊은이가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밤마다 늑대가 방 앞을 지키고 있는 바람에 스님이 밖에 오줌을 누러 못 나와 왔다하면 보름을 못 견디고 줄행랑을 친다는 그 오지에 내 몸이 묻힐 뻔 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몸이 오그라 붙곤 한다.
그 분교에서 안 사실이지만 독사는 몸이 느리고, 독이 없는 뱀은 엄청 빠르다. 미친년 널뛰듯 머리를 든 채 도망을 가는 뱀은 대부분 독이 없다. 그 날 화단의 그 살모사는 품위가 너무 당당했다. 살도 통통하게 쪘고, 움직임이 당당했고, 도도했고, 품위가 있었다.
잔치국수와 복어국
이천 원짜리 잔치국수로 허기진 배를 채운 나는 비지땀을 흘리며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벤츠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기사가 재빨리 다가와 문을 열자 노신사 하나가 무겁지 않은 가방 하나를 들고 내렸다. 그러더니 많이 가본 집인지 바로 맞은편 일식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복국을 먹기 위해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한반도 통일에 목숨을 걸고 있는 나는 이천 원 국수에 만족을 하고, 저 신사는 직업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기사가 열어주는 벤츠에서 내려 폼 나게 자그마한 돈가방 하나 들고 에어컨이 시원하게 나오는 복국 집으로 위풍당당 걸어 들어갔다. 나보다 조금 나이가 더 많은 저 신사는 한반도의 통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들어가는 놈의 멱살을 잡고 임마, 복국 먹을 자격이 있는지 내가 심사를 좀 하자! 너, 한반도는 어떻게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어? 통일시킬 프로젝트 같은 거 있어? 없으면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자. 북한과 싸워 반깨자반을 만들어 통일을 했으면 좋겠어, 아니면 평화적으로 했으면 좋겠어? 내가 그걸 알 턱이 없지! 없는 놈은 복국 먹고, 아는 인간은 잔치국수 먹고! 하, 세상이 궁상각치우네...
내일 나는 여의도로 간다.
뒷이야기-종점에서부터 서서 가는데, 중간에 지하철이 서자 앉아 있던 사람이 내리고, 그 빈자리에 금방 지하철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낼름 앉는다. 헐, 종점에서부터 서서 온 우리는 몸에 힘이 빠진다. 우리네 인생도 그와 많이 비슷하다. 운이 좋으면 당신은 금방 앉을 수 있고, 줄만 잘 서면 금방 그들의 아방궁에 입성을 할 수 있다. 재수하고 담을 쌓은 사람들은 평생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살아야 딱 한 번 그 운이 올까 말까이다.2014728도노강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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