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기행
스트레스 때문에 서울을 피해 피난을 간 속초. 독 속에 보약성분이 없는 건 아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번에 내게 달라붙은 스트레스는 보약이 아닌 독이었다. 그 스트레스가 위에 붙으면 위암, 유방에 붙으면 유방암, 심장에 붙으면 심장마비, 머리에 붙으면 뇌출혈 내지는 뇌경색이 된다. 고약하다. 골로 안 가면, 살아 험한 꼴을 한 채 살아야 한다.
나는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 고기를 먹지 않는 나. 10년 넘게 채식주의자로 살아온 내게 고지혈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나? 밤에 자다 어라차차, 하고 힘이라도 주면 다리에 쥐가 나 죽는다. 풀만 먹는데도 내 혈관 속에 기름이 차 있다는 게 해석이 안 된다. 육즙을 핥고 빠는 그들과 나의 그 경계가 이해가 안 되고, 해석이 안 된다. 밤에 잘 때, 그리고 꿈속에 아무도 몰래 나 혼자 허겁지겁 육즙이 질질 흐르는 고기를 뜯나? CCTV로 확인을 하고 싶다.
20여 년 전, 나는 심장마비로 죽는 줄 알았다. 그 때는 담배를 피울 때였다. 심장이 돌덩어리처럼 굳는데도 위기가 사라지면, 살았다는 안도감에 담배를 물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에이 더러워 담배를 끊는다, 하고 내 정신의 비타민이자 20년 동지인 그 친구를 그렇게 바람처럼 날려 보내버렸다. 그게 20여 년 전의 일이다. 술도 10년 정도 끊었다. 삼백육십일 술을 마신 내가.
바다, 그리고 산
울산바위와 비선대로 가는 길의 이정비, 나는 비선대를 택했다. 공기는 맑았지만, 더웠다. 내 앞에는 50대 아주머니 네 명이 배낭을 맨 채 가고 있었다. 고어텍스로 무장한 그녀들, 대청봉으로 가는 게 분명해 보였다. 비선대까지 한 번도 나는 고어텍스 팀들을 앞지르지 못했다. 늙어가고 있나? 작년까지만 해도 팔팔했는데! 아침을 먹지 못해 그러나? 이럴 때 초콜릿이라도 하나 씹어 먹으면 힘이 좀 날 텐데, 앞에 가는 고씨들에게 하나 달라할까? 대신 물가에 가 손을 씻었다. 하, 빙하가 녹은 물처럼 차가웠다.
관음굴 앞에서
3km. 설악산 입구에서 비선대까지의 거리가 3킬로미터였다. 비선대에 도착하자 중학생들이 단체 여행을 왔는지 휴게소를 점령하고 있었다. 입에 얼음과자를 하나씩 물고 있는 아이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잠시나마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경상도 보리 문둥이들이구나. 고향과 언어의 관계는 참으로 밀접하다. 30년 넘게 서울생활을 하고 있지만, 아직도 입만 열었다 하면 방언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내 신분은 세탁이 되지 않는다. 조금 흥분을 하면 방언은 물론이고, 욕도 고향의 육두문자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듣는 사람들이 기절을 할 정도로 살벌하다. 사실은 그 육두문자가 일상어인데, 듣는 그들은 그렇게 안 들리는 모양이다.
고어텍스 팀들은 비선대 휴게소의 전망 좋은 자리에 퍼질고 앉아 찌짐에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대청봉이 아닌 비선대가 목적지? 하, 복장은 누가 보아도 대청봉인데, 아깝다. 완전무장의 그 끝이 결국 비선대이구나.
나는 바위에 누웠다. 찌짐도 생각나지 않았고, 막걸리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청봉도. 누운 나는 까마득하게 보이는 관음굴을 미간을 좁힌 채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관음굴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의지나 열정이 없으면 어렵다.
절박함이 있어야 한다
정신이 무거워야 한다
무력증
며칠 째, 나는, 내 가방 속의, 그 내용물을, 꺼내지 못하고 있다. 꺼내 다시 정리를 해 어딘가로 날려 보내야 하는데, 봉투를 열지 못하고 있다. 꺼내면 되는데, 손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천근만근의 무게가 내 몸과 정신을 누르고 있다.
사정권 안의 그들, 비전이 보이지 않고, 희망이 보이지 않고, 꿈이 보이지 않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적폐와 부패의 원판인 박근혜, 그런 그녀가 적폐를 이야기하고, 부패를 이야기한다는 게 말이 되나? 그리고 야당을 보자. 박근혜 정부 출발부터 지금까지 입이 벌어질 정도로, 야당을 돕기 위해 하늘이 내려준 그 좋은 호재들을 가지고 목숨을 건 채 투쟁을 했으면(박근혜처럼 물고 늘어졌으면) 심약한 박근혜는 몸소리가 나 벌써 청와대를 자기 발로 걸어 나왔을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의 야당,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두리뭉실 뭉개며 오다 보니 정치가 저 모양 저 꼴이다. 김한길,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일차적으로 그 좋은 호재를 다 말아먹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을 놓고 서울광장과 청계광장에서 촐불집회가 열릴 때마다 마지못해 참석을 한 야당 지도부. 그 때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눈을 부라리며 당신들, 대선불복이냐? 하고 공격을 하면 그들은 손사래를 치며 아, 절대 아닙니다, 다만, 사과만 좀 해주십시오! 하고 박근혜를 돕는데 열과 성을 다한 아마추어들. 지금 새민연에서 정청래 최고위원 혼자 고군분투를 하고 있다. 아득하고 까마득하다. 오늘도 현상유지에 목숨을 걸고 있는 그런 그들의 야만적 태도에 내 몸은 얼어붙고 말았다. 하수인 그들
분노가 없고
눈물이 없고
사즉생의 장렬함이 없다
어제 광화문의 세월호 그 장소로 가다 그를 보았다. 세월호를 철천지 원수로 생각하고 있는 동아일보 앞의 그들. 그곳에서 김문수 전 지사가 시민들 몇몇과 하트모양을 한 채 사진을 찍고 있었다. 순간 내 몸이 오그라 들었다. 나는 빠르게 그 현장을 스쳐 지나갔다. 한 때 나는 그가 대한민국을 이끌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공직자들 중에서 김문수 지사만큼 청렴한 사람이 있을까? 군계일학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어느 날부터 내 사정권에서 사라져버렸다. 그의 국가관과 통일관 때문이었다. 광화문 광장에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동상을 세워 세계를 상대로 두 사람의 통치이념을 널리 선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서강대에 찾아가 학생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면서 솔직히 박근혜 대통령과 동문이라는 사실이 기쁘지 않느냐? 라고 했다가 학생들로부터 조소와 비웃음을 받았다. 한 때 박정희와 박근혜을 싸잡아 비판했던 그가 아니었나? 그런 그가 대권이라는 큰 꿈을 잡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하루아침에 내팽겨쳐버렸다. 우리 국민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를 하던, 나는 그를 괄호밖으로 쫓아버렸다. 어제의 그, 솔직히 초라해 보였다. 그는 한쪽만 보기로 작정한 외눈박이었다. 나는 그의 비서실장에게 문자를 날렸다. 오늘부로 지지를 철회한다고. 죄송하다고 했다.
이 무력증에서 탈출하기 위해 다시 어디로 가야 한다. 어디로? 식당이다. 가서, 아주 매운 쭈꾸미를 한 그릇 먹으며 땀을 뻘뻘 흘리고 나면 내 몸과 정신을 칭칭 감고 있는 스트레스가 물러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시 일어서야지! 나에게 향하고 있는 저 많은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내가 나를 사랑하는 그 길뿐이다.
뒷이야기-인문학적 지식과 상상력, 정말 중요하다. 특히 시대를 진단하고 시대를 끌고 가는 선지자라면 인문학과 상상력은 필수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우리 시대를 갈라놓고 있는 두 이념인 가치와 소비를 분석하고 따질 머리가 없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Why가 없다. 왜 돈을 벌어야 하고, 번 돈은 누구를 위해, 또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를 묻고 따져야 한다. 나라는 부자인데, 국민은 궁휼하다, 좋은 나라일 수 없다. 박근혜는 이쯤에서 물러나야 한다. 정신이 온존하다면 자기 발로 이제 나가야 한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 그 길이 본인은 물론이고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길이다. 201556도노강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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