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폐렴과 독감주사를 맞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종로보건소가 어디에 있나 구글로 검색을 했다. 찾았다. 오늘은 1타 2피. 폐렴도 잡고 독감도 잡자. 처음 맞는 주사다.
지하철을 탔고, 내려 한참을 걸어갔다. 보건소 소장님이 연세가 있었다. 폐렴주사 맞으러 왔다고 하니, 독감주사를 맞았느냐? 고 묻는다. 안 맞았다고 하자 독감을 먼저 맞아야 폐렴을 예방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폐렴을 맞아야 독감이 와도 폐렴에 안 걸린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리까리했다. 누구의 생각이 맞나?
독감은 소장이 가르쳐준 대로 근처 이비인후과에서 맞았다. 주사 두 대를 동시에 맞아도 됩니까? 나이가 많은 여자 원장선생님이 괜찮을 거다. 라고 했다. 이제 죽는 그 날까지 폐렴은 없다. 공짜는 기분이 좋다. 폐렴도 독감도 공짜였다.
#2. 나는 비건이다
이 세상에 독종이 있다. 독일병정보다 더 독한 독종이 있다. 누가 독종일까? 지금 감옥에서 이를 뽀도독 갈고 있을 두 사람, 이명박과 박근혜 전통일까? 아니다. 그 두 사람은 나는 억울하다, 라고 생각은 할지 몰라도 독종은 아니다. 독종은 감옥 밖에서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물론 건강 때문에 채식을 하지만, 그것 하나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은 두,세 수 앞을 내다본다. 첫째, 지구를 살리자. 둘째, 동물과 어패류를 살리자. 셋째. 기후변화를 늦추자. 한마디로 현재와 미래까지 내다보면서 살아가는 철인들이다. 그러니까 철학적 사고를 하며 삶을 사는 것이다. 독종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세상 사람들 열에 열은 고기, 하면 콧구멍이 벌렁벌렁 넓어지면서 사족을 못 쓴다. 국민고기인 삼겹살과 곱창이 노릇노릇 익으면 침을 꿀꺽 삼키면서 젓가락질을 한다. 한 점 먹으면 그 다음은 아, 너무 마싰다! 하는 감탄사가 나온다. 나는 아! 하고는 거리가 멀다. 나는 고기도, 술도, 담배도 안 한다. 치즈도 우유도 요구르트도 안 먹고 안 마신다. 20년이 더 지난 세월이다.
#3.퀸의 프레디 머큐리와 그 멤버들은 전설이다
며칠 전 보헤미안 랩소디를 서울극장에서 4천 원을 주고 봤다. 토요일 오후 집사람과 다시 보았다. 우리 두 사람은 서울극장을 좋아한다. 좌석도 넓고 좌석 앞과 뒤의 간격도 넓어 자리에 앉으면 마음까지 넓어진다.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극장은 좌석이 비행기 좌석처럼 앞뒤도 좁고 좌석도 좁다. 안에 앉게 되면 여간 불편하지 않다. 못 된 자본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서울극장은 좌석이 대천 한바다다. 여유가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면서 나는 전율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퀸과 프레디 머큐리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비틀스 다음으로 퀸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영화로 만난 퀸의 프레디 머큐리와 그 멤버들 정말 대단했다. 그들의 히트곡 22곡이 터져 나오는데, 애를 먹었다. 마치 클래식을 들을 때와 같은 접신이 일어나려고 내 정신과 몸이 자꾸 떨리곤 했다.
#4. 나도 전설이다
나는 술과 담배, 책, 그리고 음악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운명처럼 그렇게 된 것이다.
그 해 어느 날, 나는 24시간 쉬지 않고 소주 16병을 마신 기록을 가지고 있다. 밥은 생략하고 소주만 마셨다. 16병째의 마지막 잔을 마신 나는 마침내 의식을 잃어버렸고, 앉아 있던 탁자의 의자에서 땅바닥으로 쿵, 고꾸라지고 말았다.
아시아의 마지막 밤풍경을 노래한 공초 오상순 시인. 촌수로는 아제다.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면 담배부터 문 공초 오상순 시인의 주 무대는 명동이었고, 그는 담배를 항상 물고 있었다. 귀천의 천상병 시인이 막걸리와 친구했듯이, 공초 오상순 시인은 담배가 밥이었다. 20 년 전의 나도 담배에 관한 한 전설이었다. 술과 담배가 내 밥이었다. 얼마나 많이 마시고 태웠는지 내 손은 수전증이 걸려 종이 하나 쥘 수가 없었다. 세계 담배 많이 태우기 올림픽 대회가 있어 출전을 했으면 금메달은 몰라도 동메달 정도는 족히 목에 걸었을 것이다. 부끄러운 역사였지만 그 때의 나는 술과 담배에 관한 한 전설이었다.
나는 종종 블로그에서 밝혔다. 음악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말한다. 나와 갑장인 지휘자 정명훈 씨보다 1시간은 더 들었을 것이다. 하루에 6시간 정도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하루에 10시간씩 책을 보는 사람들도 별로 없을 것이다. 10년과 50년 세월이었다. 이제는 클래식음악을 못 듣는다. 접신 때문에.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하루에 5시간씩 10년 간 음악에 빠지면 신이 내려오고 그리고 접신이 이루어진다. 접신은 곧 무당이 된다. 정신과 몸, 그리고 음악이 하나가 되어 무아지경의 세계에 빠져 들어간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음악을 깊게 안 듣는다. 책은 예외다.
#5 시인 박노해, 작가 유시민, 그리고 내 친구 쿤타 킨테
시인 박노해가 경주내남교도서에 7년 동안 수감생활을 할 때 책을 15,000권 읽었다고 모 일간지와 인터뷰를 할 때 말했다가 유시민 작가로부터 호되게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거짓이다. 어떻게 7년 동안 15,000권을 읽을 수 있단 말인가? 자, 계산을 해보자. 누가 덤벼도 하루에 3권 이상은 읽기가 불가능하다. 좋다, 3권을 읽었다고 하자. 그럼 10일이면 삼십, 한 달이면 90권이다. 90권 곱하기 12달이면 1080권이다. 그렇다면 1080권 곱하기 7년이면 8000권이 채 안 된다. 그런데 어떻게 15,000권이 나오나? 구라다. 고로 박노해 시인의 그 말은 거짓이다. 그 신문을 보고 계산을 한 유시민 작가도 대단하다. 아마 거짓말을 바로 잡기 위해 분노를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한 때 나는 내 친구 쿤타 킨테가 시인 박노해인 줄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내 친구 쿤타 킨테의 직업은 목수였다. 그는 주경야독을 실천하는 보기 드문 독종이었다. 글도 엄청 잘 썼다. 그래서 고향에서 고등학교나 전문대학을 나온 친구들과 비교를 하면 하늘과 땅이었다.
저 놈이 바로 박노해다. 늘 궁금증을 달고 살던 어느 날 나는 귓속말로 ‘쿤타 킨테, 니 임마 박노해제?’라고 물었다. 그러자 쿤타킨테는 빙그레 미소를 지을 뿐 답을 하지 않았다. 아, 이 새끼가 진짜 박노해구나. 그렇다면 비밀을 지켜주어야지. 잡혀가면 그 날이 제삿날이다.
목수이자 학구파인 내 친구 쿤타 킨테는 한 때 통일교에 빠져 허우적거린 세월이 있었다. 어느 날 새까만 양복을 입은 쿤타 킨테가 ‘친구야, 나 오늘 서울 장충체육관에 가.’ ‘와?’ ‘장가 가.’아, 내 친구 쿤타 킨테가 드디어 장가를 가는구나. 1미터 60이 안 되고, 피부는 새까맣고 툭 튀어나온 입술은 영락없는 아프리카 쿤타 킨테의 그들과 친구였다. 통일교에서 일 년에 한 번씩 하는 결혼식.
교주 문선명이는 황제다. 황제가 교단 위에서 손으로 가리키며 니는 이 사람, 니는 저 사람, 하고 현장에서 짝을 지어주는 그 결혼식에 간 것이다. 그런데 결혼식을 마치고 내려온 쿤타 킨테의 얼굴이 이상하게 어두웠다. 쿤타 킨테는 내심 기대했을 것이다. 내 짝은 얼굴이 하얀 미국 백인여자일 것이다. 아니면 예쁜 일본여자. 아뿔싸, 그게 아니었다. 그 날 교주 문선명이가 지어준 자기 짝은 아프리카에서 온 검은 얼굴의 여자였다.
얼마 후 개신교로 개종을 한 쿤타 킨테, 모 대학출신이자 일어번역을 하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 날 강남의 어느 아파트 안 포장마차에서 자기 여자 친구를 소개시켜준 쿤타 킨테. 미인이었다. 대학에서 일어를 전공했고, 지금은 일어번역을 하고 있다고 했다. 축하한다! 내 친구 잘 봐주십시오! 하고 건배를 했다. 노태우 정부가 펼친 백만 호 주택정책 때 분당에 대단위 아파트 건설붐이 일어났다. 그 때 오야지 목수로 참여를 해 큰 돈을 번 내 친구 쿤타 킨테.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마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순수하면서 독종이기도 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말의 달인인 내 친구 쿤타 킨테.
이제야 밝히지만 내 친구 쿤타 킨테는 시인 박노해가 아니었다. 어쨌든 시인 박노해를 만난 일은 없지만 그의 관상을 보면 참으로 복잡하다. 참과 가가 얽히고설켜 있다. 그가 쓴 노동의 새벽, 이 땅의 노동자들로부터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 시 한편이 어두운 회색빛 세상을 밝히는 희망의 빛이 되곤 했지만, 정작 시인 박노해 자신의 삶을 보면 그 어디에도 노동은 없었고, 없다. 노동하고는 거리가 너무 먼 시인이다. 등어리에 하얀 소금꽃을 피어 보지 못한 노동자는 노동과 삶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나는 지금도 지면을 통해 그를 볼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곤 한다. 턱에 난 염소수염을 보면 시리아 무슬림의 자살특공대 대원 같기도 하고, 얼굴 속의 보이지 않는 희미한 그 세계는 여러모로 물음표를 찍게 만들고 있다.
생략하고, 어쨌든 나는 이 세상을 읽고, 해석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미친 듯이 책을 팠고, 술과 담배 그리고 음악 속에 빠져 들어갔다. 한 때 나를 졸졸졸 따라다닌, 지금은 서울의 어느 유명 대학교 정치학교수가 되어 있는 고향 후배인 그놈은 늘 그렇게 말했다.
'형님은 멸종위기에 처한 희귀동물입니다.'
'뭐, 뭐라고? 택도 없는 소리하지 마라?'
'씨발놈, 니 요기 와봐라, 나한테 조지 한 번 튀나오도록 맞아볼래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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