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진주라 천리길

오주관 2009. 6. 4. 13:47

 

 

촉석루. 이곳 진주는 큰 이모님이 사시던 곳이었다. 큰 이모님을 뵙기 위해 몇 번 진주를 오가면서 지금도 기억이 새로운 것은, 신식 이모님이었다. 아무꺼시야, 맥주 한잔하자. 아무꺼시야, 담배 있나? 없으면 담배 한갑을 슬쩍 주머니에 찔러주시곤 했다. 포항시청에 근무를 하던 큰 이모부님이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사십에 홀로되신 이모님. 언변이 좋은 우리 큰 이모님, 그래서 우리는 변호사님이라 부르곤 했다.

 

 

 

 

 

황포돛대. 남녀가 노를 저으며 사랑을 키우고 있나. 아니면 논개와 왜장. 남강은 의외로 컸다. 도시에 강이 없으면 삭막하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시원한 강이 있으면 정서상 큰 거름이 되지 싶다.

 

 

 

 

 

이모님 따라 이곳 촉석루에 왔던 기억이 있다. 그때 어린시절의 큰 이모님은 도깨비였다. 어머니를 따라 포항 어느 가정집에 가면 큰 이모님이 계셨다. 그러다 다시 오천 용덕동에 가면 그곳에도 큰 이모님이 계시는 것이었다. 하, 이상하다. 큰 이모님이 축지법을 사용하나. 알고보니 큰 이모부님 병 간호를 위해 병원 근처에 방을 하나 얻어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큰 이모부님은 정말 미남이었다. 키도 크고 얼굴이 김유신 장군 모양 부리부리했다. 목소리는 도밍고였다. 지금도 기억이 새로운 것은 큰 이모부님 집이 얼마나 큰지 대문에서 집까지 걸어 들어가려면 한나절 걸릴 정도로 멀었다. 본채, 사랑채, 헛간, 우물 그리고 마당까지 다 합하면 대천 한바다였다. 집에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었는데, 제사 때마다 우리 형제들은 이모님 집에 가서 제사밥을 얻어먹곤 했다. 어느 해, 콩나물국을 먹었는데, 그 맛이 너무 깊었다. 난생 처음 맛을 본 그 맛! 그 콩나물국의 맛의 비결은 아지노모도였다.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죽은 그 장소. 마실 때는 홍콩이었는데 그 자리가 차마 저승길일 줄 꿈 속에서도 몰랐을 것이다. 그날 날씨가 풍덩! 뛰어들게 할 정도로 더웠다. 어느 해 부산대 병원에 입원해 있는 큰 이모님을 찾아뵈었을 때 큰 키의 큰 이모님은 뼈만 남아 있었다. 폐암. 젊어서부터 담배를 즐겨 피우셨던 큰 이모님. 내 손을 잡고 하신 말씀. 야야, 나는 죽어도 되지만 니는 앞이 구만 리 아이가. 담배 끊어라. 수의를 어머님에게 부탁하신 큰 이모님. 시작과 끝이 분명하셨던 큰 이모님이 가끔씩 떠오르곤 한다. 동해면 선산에 큰 이모부님과 나란히 묻혀 계시는 이모님. 삶이라는 게.... 아직도 이모님을 찾아보지 못하고 있다. 아이고 야야, 너거 할아버지는 선비시니라. 술을 마셔도 걸음걸이가 대쪽이었다. 우리 집을 찾으실 때마다 들려주시곤 한 레파토리.

 

 

 

 

 

더웠지만 바람도 만만찮게 불었다. 남강은 깨끗했다. 진주에서 예술인이 많이 배출되는 그 젖줄이 바로 이 남강이지 싶다. 강과 산, 그리고 바다.

 

 

 

 

 

산책로. 큰 이모부님이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밥을 얻어먹으러 큰 이모님 집의 식구들이 역으로 우리 집을 가끔씩 찾곤 했다. 큰 형님은 우리 집에 오면 엘피지 판을 그렇게 탐을 내었다. 고등학생이었던 큰 형. 후에 이모님 집에 가 큰 형 방에 가보면 우리 집의 엘피지 판이 그곳에 있는 것이었다. 셋째 형은 우리 구멍가게의 알사탕을 엄청 좋아했다. 소풍길에 나서는 나를 잡고 흥정을 벌이는 품목은 늘 구슬과 딱지였다. 아무꺼시야, 이 구슬하고 딱지 줄게 알사탕 줄래? 알사탕도 뺏기고 나중에는 삶은 고구마 세 개 중 하나를 주고 나면 남은 건 밥과 고구마 두 개 그리고 동방사이다 하나. 지금 생각해보면 형은 영업에 달인이었다. 어느 해 가을에는 큰 이모네 집 디딜방아가 있는 헛간에서 셋째 형과 계란 속에 쌀을 넣어 밥을 만들어 먹곤 했다. 바지에 늘 칼날이 져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셋째 형. 인심이 후했고 인간미도 있었다. 결혼을 해 가정을 꾸려나가다 어느 해 자신의 존재를 허공에 날려버린 셋째 형. 끝도 형의 그 성정을 닮아 있었다.

 

 

 

뒷이야기- 요 며칠 끔찍했다. 바보들 속에 들어가면 바보가 된다는 사실. 고향 사이트에 글을 몇 편 올렸는데 그 글 때문에 내 고향 사람들이 삥 돌기 일보직전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그곳에 글을 올린 목적은 닫혀 있는 고향의 마음을 열게 하자, 라는 뜻으로 글을 올렸는데 약이 되기는커녕 그들을 반 미친개이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정서의 공통점이 노무현은 나쁜 놈, 이명박은 좋은 지도자. 글을 옳게 읽지도 않은 채 인신공격이 들어오는데 제일 남감했던 것이 좌파였고 그 다음이 미친놈이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나를 보고 이북에 가서 살아라 라는 망말까지 쏟아내는 것이었다. 광풍의 쏠림현상이었다. 그 사이트는 이상하게 새끼! 나 놈이라는 단어를 실을 수 없도록 장치를 해놓아 내 속은 부글부글 용광로였다. 내 고향은 외딴 섬이었다. 언젠가는 다시 공격을 해 고향의 성을 무너뜨릴 것이다. 무지는 죄악이다. 탐욕 또한 죄악이다. 하, 괴롭대! 하, 미치겠대! 라고 토로한 황구라가 생각났다. 고향은 내가 파고 들어가 놀 곳이 아니었다. 글을 다 지워버렸다. 그래야 그들이 산다. 언제인가 정교수가 그랬다. 형님, 고향사람들이 형님의 글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해석이 되겠습니까? 그 말을 진작 들을 걸. 개망신을 당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또 한 사람의 바보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12분 실감한 며칠이었다. 존재를 던짐으로써 자신과 나라를 구한 그는 한 나라의 지도자이기 전에 사상가요 이상주의자요 혁명가였다. 200964도노강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