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둘레길의 3코스(16킬로 중) 중간 지점. 경남 함양에서 축발해 전라북도 남원을 거쳐 다시 경남 함양으로 오는 코스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출발!
갈 수 있을까?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나는 산에만 가면 산사나이가 된다. 걷는 게 가장 행복한 사나이가 나다. 걸으면 만사가 행복이다. 나는 정녕 길 위가 본적이고 현주소이다.
뒤에서 살피며 따라간다. 대장은 그래서 외롭다. 대장은 그래서 고독하다. 10.8킬로를 5시간만에 도착해야 한다. 가다가 주막을 만나 막걸리 한 사발할 시간도 아껴야 할 판이다.
숲과 밭에 고사리와 두렵이 많았다. 등산객이 얼마나 슬쩍했는지 푯말이 곳곳에 서 있었다. 남의 농작물을 슬쩍 하면 형법 293조에 해당이 된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중에 더덕도 뽑고 나물도 슬쩍하는 아낙들과 남정네들이 있었다.
지리산의 주막. 이런 주막이 네 군데 있었다. 아직은 인심이 살아 있었다. 모르지, 이곳도 시간이 흐르면 낫을 들고 등산객들 얼굴의 껍질을 안 벨지 장담 못 할 일. 누가 그렇게 만드나?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을 누가 날강도들로 만들었나. 우리 남한 사람들이 만들었다.
지리산 곳곳에 있는 다랭이논. 이게 상품이란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다랭이논. 저 논에서 벼가 자라지만 이곳 지리산에서 우리가 정녕 기대해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닌 사람의 따뜻한 정이여야 한다. 정을 주고 정을 받는 우리 본래의 본성을 회복해야 한다.
막걸리 한 사발과 파전, 그리고 수제비를 시켰더니 김치와 나물이 이렇게 나왔다. 막걸리를 한잔 들이켰는데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다. 오메! 이렇게 맛있는 막걸리는 난생 처음이었다. 서울막걸리와 포천의 이동막걸리는 술이 아니었다. 하! 진국이었다. 욕이 나왔다. 지금까지 마신 막걸리는 막걸리가 아니여! 김치와 된장은 또 어떻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덩게가 있었다. 똥을 누고는 덩게 한 삽 퍼 뿌리면 된다. 인간도 살고 땅도 살고. 상생이다. 자연과 우리는 필시 하나였다. 자연과 우리가 따로 국밥이 되면 결국 우리는 망한다.
저 멀리 자태를 감추고 있는 천왕봉. 저 곳을 갈 수 없는 낙오자들이 찾는 지리산 둘레길. 저 팀들과 걸으면서 나눈 화제의 주제가 천안함이었다. 1번이 무얼 이야기하는 걸까? 한나라당을 찍으라고 쓴 거잖아. 상식을 말해야지. 도무지 이야기가 같은 이야기를 해야 설득이 되지. 우리 국민을 뭘로 보고 그렇게 시나리오를 써 댈까. 그런데 이번 6,2지방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할 것이다. 그게 결론이었다.
그윽했다. 그윽해서 바쁘지 않았다. 지리산은 시간이 아닌 세월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래, 시간은 아니었다. 인고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기다림. 끝내 일어나는 그 무엇. 태초의 숨결을 마시며 걷고 걸었다.
보기가 딱했다. 평지에서 조금만 빠르게 걸으면 잠깐만, 천천히 갑시다. 정해진 시간에 발걸음을 맞추어야 하다 보니 힘이 들었을 것이다. 그대! 어제 그 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생각하며 걸었는가? 우리가 꿈꾼 이데아! 올 것이다. 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이 나라의 근본이 뒤바뀔 그 날이.
마지막 고개. 저 고개만 넘어면 결승점. 8부 능선이 가장 힘이 든다. 5시간 끝에 마침내 10, 8킬로의 끝. 이번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얻은 소득 하나. 고통 그 자체가 순례길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순례길. 우리의 자아와 정체성을 담금질하기 위해 떠난 순례길이 아닌가. 아따, 다리가 만근이네! 이제 서울로 돌아가자.
뒷이야기- 버스에서 내려 비를 맞고 있는 지리산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였다. 설악산이 아버지라면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었다. 넓은 가슴을 가진 어머니. 넓고 깊은 지리산을 바라보았을 때 고향을 보는 듯했다. 지리산 둘레길 3코스인 10,8킬로를 향해 첫 발을 내디뎠다. 비, 바람뿐이었다. 인도, 좁은 농로길, 숲길을 따라 계속 걸었다. 천식이 있는 옆지기가 고군분투를 하고 있었다. 체 게바라도 정글에서 전투를 하면서 쥐어짜는 가슴의 통증 때문에 고통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순례는 고통 그 자체다. 고통을 통해 나를 찾고 고통을 통해 우리를 찾아 나서는 길이 순례길의 목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리산 둘레길에서 내가 찾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2010522도노강카페에서.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례- 보성 녹차밭에 가다 (0) | 2010.06.13 |
---|---|
순례-강원도 양떼목장 (0) | 2010.06.05 |
3.1절-속초에 갇히다 (0) | 2010.03.02 |
용문으로의 겨울 여행 (0) | 2010.02.07 |
겨울산으로 가다 (0) | 2010.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