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1월 7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정치국은 동독주민들에게 ‘서독에의 이주를 의미하는 여행’을 허락한다는 안건을 승인하였다. 물론 내무부장관과 국가공안국장관은 다른 안을 제안하였다. 동독을 영원히 떠나려는 사람에게는 허가를 내주고, 쾰른에 사는 친척을 방문하려고 주말여행을 신청한 사람에게는 거절한다. 이 규칙을 만든 사람들에게는 모순이 아닐 수 없었다. 드디어 여권을 소지한 사람이(당시에 동독에서 여권을 소유한 사람은 4백만 명이었다) 신청한 후 빠른 시간 안에 일반적인 여행자유를 허락하는 내용의 규정이 만들어졌다.
이 규정은 1989년 11월 9일 사회통일당의 정치국에 의해 결정되었고 다음날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그 전에 새로운 국가·당 수반인 크렌츠(Egon Krenz)는 이 조치에 대한 모스크바의 승인을 얻으려고 시도하였다. 동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인 코체마소브(Kotschemassow)는 단지 외무차관과의 전화통화를 통해 이 규정을 승인하였다. 이렇게 됨으로써 사회주의통일당의 대변인 권터 샤보브스키(Gunther Schabowski)는 이 규정을 발표할 수 있었으며, 그는 1989년 11월 9일 저녁 7시 기자회견이 끝날 무렵 이를 발표하였다. 이 규정이 언제부터 실행될 것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오후에 있었던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그는 정치국 성명에 포함된 앞부분 두 단어를 고려해 ‘지금 당장, 지체 없이!’ 라고 공포하였다.
서독과 동독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은 그 날 그렇게 무너져 내렸다
그 때까지 독일이 통일될 것이라고 믿은 사람은 없었다. 동독은 더더욱 통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승전 4개국 역시 독일의 통일을 진심으로 바라지 않았다. 독일과 국경을 맞댄 채 살아가고 있던 주변국들도 독일이 통일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독일은 이미 역사적으로 큰 죄를 지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나라들은 강한 독일의 탄생을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고 볼 때, 독일의 통일은 천운이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추락하고 있는 동독의 경제와 양 독일을 둘러싸고 있던 국제적 환경에 의해 까마득히 멀기만 한 통일이 어느 날 그렇게 온 것이었다.
독일의 통일을 도운 국내외 환경
1. 동독시민의 집단 탈출과 대규모 시위
동독이 1989년 초반까지 여전히 스탈린식 사회주의에 집착하고 있는 동안, 폴란드와 헝가리는 소련의 당, 국가수반이었던 고르바초프(Michail Gorbatschow)의 개혁정책에 자극받은 한편 당시 미국 대통령 부시(George Bush)의 지원정책에 힘입어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했다.
헝가리의 개혁공산주의자들은 동독을 비롯하여 전 동구권 체제를 동요시킬 만한 급진적인 조처를 취했다. 헝가리는 1989년 5월 2일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있던 설치물들을 제거하기 시작했으며, 같은 달 동독과 맺었던 여행협정을 파기했다.
2. 1989년 8월 25일 서독수상 콜(Helmut Kohi)과 헝가리 수상 네메트(Miklos Nemeth)는 양국 외무장관 겐셔(Hans-Dietrich Genscher)와 호른(Gyula Hom)을 배석시킨 비밀회담을 갖고, 헝가리의 국경개방에 대한 대가로 독일이 10억 마르크에 해당하는 차관을 지원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3. 동독시민들은 라이프치히, 동베를린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도시에서 연일 계속된 시위와 이에 대한 서독 TV 보도를 통해 호네크가 그동안 내세운 업적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1989년 10월 18일 동독 중앙위원회가 모스크바로부터의 압력 없이 호네크를 실각시키고 에곤 크렌츠(Egon Krenz)를 서기장으로 선출한 것은 동독지도부가 악화된 사태를 직시하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4. 고르바초프는 1990년 1월 말 기존의 입장을 바꿔, 소련이 양 독일의 정치적 연합에 대해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동독의 붕괴가 이미 되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어 갔다고 고르바초프가 직감한 것은 이런 입장변화의 이유였지만, 서독정부가 생활필수품을 ‘아주 호의적인 가격(Freundschafts- preis)'으로 소련에 제공하여 러시아의 물자난을 완화시켜 주겠다고 약속한 것 또한 이런 태도변화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
5. 독일통일을 앞당긴 동독의 경제
1989년 동독경제가 붕괴 직전에 있다는 것은 여러 징후를 통해 암시되었다. 무엇보다도 동독의 지불불능 위험 때문에 상황은 특히 절박했다.
독일의 통일은 이렇게 씨줄날줄이 운명적으로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독일통일은 아데나우어 수상의 ‘서방정책(Westpolitik)’, 아니면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Ostpolitik)’ 에 의해 온 것일까?
콘라드 아데나우어 시대(1949~63)에는 서독의 서방통합이 완성되었다. 의회위원회 의장인 아데나우어는 최초의 수상으로 탁월하게 활동했다. 그는 동방과 서방을 전전하는 시소 정책이 아닌 서방 동맹체계에 더욱더 통합됨으로써 더 많은 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동방정책은 별로 진전이 없었다. 그리고 독일통일은 점점 멀어졌다. 그가 주장한 ‘강자의 정책은(Politik Starke)동독의 붕괴로 이어지지 않았다.
1969년부터 1982년까지는 사회민주당의 빌리 브란트(Wiiiy Brandt,1969~74)수상과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1974~82) 수상 하의 연립정부 시기였다. 브란트 수상의 목표는 동방정책과 독일정책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었다.
독일통일은 서독과 동독이 서로 갈라지기 시작하면서 그 싹이 심어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간격이 벌어지면서 생긴 그 틈 사이에 통일의 싹은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다 1989년 독일을 둘러싸고 있던 국제적 역학관계가 독일통일에 기름을 부은 것이었다.
1.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
2. 폴란드의 국경개방
3. 무너져 내린 동독의 경제
독일통일은 독일을 둘러싸고 있던 국제적인 역학관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인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 없이 독일통일은 그렇게 빨리 달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통일 후 동독의 경제회복
동독으로부터 넘겨받은 경제문제, 오염된 환경, 사회간접자본과 건축물의 노후화, 그리고 1990년부터 등장한 경제, 사회, 구조의 붕괴 등 동서독 간 명백한 불균형을 조정하는 것은 단계적으로 최소한 15년 이상의 기간이 걸려야 성취될 것으로 보인다.
부르크하르트 베너(Burkhard Wehner)는 서독이 ‘동독을 위해서 앞으로 연간 약 2천5백억 마르크를 투입해야 2025년쯤에나 그 이전작업을 끝마칠 수 있다’ 고 평가하였다. 이에 반하여 독일노조조합연맹의 경제사회학연구소(das Wirtschafts- und Sozialwissenschaftliche Institut des Deutschen Gewerkschaftsbundes: WSI)와 몇몇 정치가들은 약 1천5백억 마르크의 순비용이 동독을 재건하는데 들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또한 독일경제연구소(das Deutsche fur Wirtschaftsforschung: DIW)는 이전비용이 연간 약 2천억 마르크에 달할 것이라고 산정하였으나, 1990년과 1991년의 통일특수를 통해 국내총생산(bip)이 증가할 것을 기대하였다. 즉 독일통일이 국민경제의 수준을 높여서 통일비용의 상당 부분을 스스로 재투자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빌리 브란트 전 수상의 동방정책
독일통일의 아버지로 불리는 빌리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빌리 브란트 서독수상은 1969년 10월 28일 정부선언에서 독일정책과 동방정책의 새로운 노선을 제시했다. 그는 ‘독일에 2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서로 외국이 아니다. 두 국가는 단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2국가론)라고 언급했다. 실질적인 정책 과제는 독일 민족의 통일을 유지하는 것이다. 정부의 선언된 목표는 동독과의 관계에서 ’규제된 병존을 넘어 공존으로 서로 다가가는 것‘ 이었다. 이에 더하여 브란트 수상은 조약으로 규율되는 협력으로 이끌 수 있는, 동등한 입장에서의 정부 차원의 협상을 동독 내각에 제안했다.
통일 후에 나타난 문제점들
통일은 환상이 아닌 현실이다. 준비 없는 통일은 환상이요 고통이다. 비록 통일이 되었지만, 동서독 간에 지금도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고 있다. Ossi와 Wessi가 그것이다. 가난하고 게으른 동독놈들! 거만하고 역겨운 서독놈들! 심리적 균열과 머릿속의 증오가 존재하고 있다. 40여 년 동안 닫힌 생활에서 온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이질적인 그 후유증이다. 그것을 치료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경제적 격차를 좁히는데 상당한 예산과 시간이 필요하다.
뒷이야기-한반도의 통일을 연구하면서 독일의 통일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권 을 찾았다. 절판이 된 이 책을 구하는데 도움을 준 한겨레신문사 출판국에 고마움을 표한다. 책 한 권을 구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애를 쓴 영풍문고 7번 코너 정치, 경제 담당 아가씨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독일통일백서에 나타나지만 독일통일은 어떻게 보면 극본 없는 연극이요 준비가 안 된 통일이었다. 어느 해 독일을 둘러싸고 있던 국제환경이 변하면서 통일이 급물살을 탄 것이다. 통일이 된 독일이 하나가 되기까지에는 1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이 진단한다. 내가 완성시켜 나가고 있는 한반도 통일도 마찬가지다. 10~15년이다. 그 기간 동안 북한의 경제를 끌어올려야 된다. 그리고 지난 반세기 동안 굳어져 있는 남과 북의 머릿속의 장벽도 걷어내어야 한다. 우리는 독일통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 명심할 것은 무력과 흡수통일은 남한과 북한을 모두 주저앉게 만든다. 통일 비용이라 생각하고 북한의 경제를 도와야 한다. 도와 북한이 어느 정도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 때 그 때 빗장을 열어야 한다. 무력과 흡수통일은 절대 아니다. 201073도노강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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