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통독 이후 지난 15년간의 힘겨운 동서 통합 과정을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가 지켜보면서 쓴 기고문과 연설문을 엮은 것이다.
그는 1990년 3월 통합 과정에서 야기될 문제들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통일은 환상이 아닌 것이다. 콜 정부는 당초 문제의 심각성과 과감한 정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이를 깨달은 후에는 정부의 인기 하락을 염려해 의식적으로 진실을 외면했다.
“아니다. 우리 민족의 통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는 통독 3년째 되던 해에 슈미트 전 총리가 내린 결론이다.
슈미트 전 총리는 이 책을 통해 구동독지역의 재건에서 특히 역점을 두어야 할 부분들을 정리하였으며, 아직도 현재진행형인 통일과정을 완수하기 위한 선행조건을 서술해놓았다.
‘원래 하나인 것은 하나로 자라게 되어 있다.’
빌리 브란트 전 총리의 말이다. 남북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남과 북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독일의 당면 과제
독일이 통일을 생각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들이 몇 있다. 다른 주변국들의 국익을 무시하고는 독일의 국익도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1.강대국으로서의 지위와 유럽에서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소련의 전략.
2. 고르바초프의 실각을 통해서든, 페레스트로이카의 성공에 따른 소련 체제의 장기적 공고화를 통해서든 소련 제국주의가 복귀할 수도 있다는 유럽의 동서 양 진영 모두의 우려.
3. 거의 모든 유럽인들의 공통 관심사로서, 후일 독일의 패권주의가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는 우려.(p,13)
연대의 협력은 모두의 몫이다
유럽에서 독일은 가장 많은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이웃나라는 나치시대에 가장 큰 불의를 겪고 핍박을 받은 폴란드와 프랑스입니다. 많은 이웃들이 우리가 다시 7천5백만 인구의 통일국가가 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7천5백만은 큰 인구입니다. 유럽에서 독일보다 인구가 많은 국가는 오로지 한 나라뿐입니다. 러시아입니다.(p,33)
점진적 개혁이야말로 민주사회의 원리입니다. 걸음걸이가 너무 크면 안 됩니다. 만일 한 발을 잘못 내디뎠는데 그 걸음이 너무 컸다면, 그 결과로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될 테니까요. 또 되돌리기도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발걸음이 너무 작아도 안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혁이 전혀 진척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p,35)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와의 우호가 필요합니다. 만일 프랑스가 ‘그래, 독일 통일에 찬성한다. 7천5백만이라! 좀 많다만 좋다!’ 프랑스가 이렇게만 나와 주면 다른 유럽국가들도 동의할 것입니다. 프랑스는 독일의 통일을 인정해 줄 수 있는 국가입니다.(p,36)
통일을 향한 단계적 조치
동서독 양 정부는 통일문제에 관하여 이웃나라들 및 2차 대전 4개 승전국들과 서둘러 합의를 도출해 내어야 한다. 이때 주요 현안은 적어도 다음 네 가지가 될 것이다. 첫째, 서방진영의 안보뿐 아니라 소련의 안보전략상 이해관계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문제. 둘째, 폴란드의 안보문제, 특히 현 독일, 폴란드 국경의 인정 문제. 셋째, 통일독일이 유럽공동체의 경제통화공동체제의 일원이 되는 문제. 마지막으로 서방세계가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에(그리고 아마도 소련을 포함한 기타 동유럽 국가들에까지) 경제 원조를 제공하는 문제.
역사적 기회를 맞은 독일
독일과 프랑스 양측은 결정적인 사실 하나만은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그것은 바로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신뢰와 긴밀한 공조가 없다면 유럽의 평화와 공동의 안보도 없으며 유럽 통합과 유럽공동체가 전 유럽을 아우르지 못한다면 우리 유럽대륙은 앞으로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결코 안정을 이룰 수 없는 것이다.(p,64)
판단 착오의 원인
바로 1989년 한복판까지도, 심지어 그해 가을까지도 정부는 통일 가능성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 통일을 위한 어떤 계획도 마련하고 있지 않았었다. 그 후, 1989년 말부터 1990년 상반기에 기회가 오고 있음을 간파하고 여러 단계별로 이 기회를 활용한 것은 몰론 콜 총리의 공이다. 1990년 5월 18일 통화, 경제, 사회통합에 관한 조약과 1990년 8월 31일 통일조약(10월 3일 발효), 그리고 1990년 9월 12일 동서독·미국·영국·프랑스·소련 간의 2+4회담 결과 체결된 ‘독일에 관한 최종합의의 조약’ 을 단계별로 이끌어냈다.
지난 40년간 서로 차단되어 상호 적대적인 정부형태 아래에서, 판이한 경제 및 사회 질서, 법 체제, 교육 체제 아래에서 어쩔 수 없이 너무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버린 우리 민족의 양 진영을 다시 한데 묶는 것, 한 편의 생산성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다른 한 편을 다시 한데 끌어안아야 하는 지난 1945년 종전 이래 최대의 도전을 콜 총리는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p,116)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그 후 1989-1990년, 국제정세와 유럽의 상황이 근본적으로 변화하여 독일 통일이 실현 가능해졌을 때만 해도, 1990년 이 후 시간이 가면서 드러난 것처럼 심리적 정신적 통일이 그렇게 어려울 줄 우리는 미처 몰랐다. 우리가 민족재단이라는 과거의 구상에 다시 착안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후기를 대신하여
독일통일을 도운 내외 문제들-첫째,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굳건히 추진한 것이다. 다음은 폴란드 및 헝가리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체제 변화가 좋은 선례가 되었다. 셋째는 지방선거에서 일어난 명백한 선거 조작에 대한 국민의 분노였고, 넷째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대량 망명사태였다.
서독은 지난 수십 년간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그 대신 심도 있게 언젠가 먼 훗날에 도래할 두 독일의 통일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 왔다. 1952년 내독관계부 장관이던 야콥 카이저가 통일문제를 다루는 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59년에 연구 모임을 만들었는데, 학자와 국회의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좌장은 나(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였다. ‘경제적 사회적 통일과정의 예측 가능한 단계’ 라는 제목의 이 보고서는, 새로 탄생할 통일독일을 위해 동서독 양측이 합의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경제정책적 문제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보고서에서 제시한 모델은 당사국인 동서독뿐만 아니라 양측의 우방국들도 납득할 수 있는, 특히 동서 양 진영의 승전 4개국도 수용할 만한 내용이었다.
통일 1주년이 되는 1991년 가을, 매우 우울한 중간 결산이 나왔다. 서독에서는 ‘자신들의 물질적, 사회적, 문명적, 문화적 수준이 떨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커지고 있다’ 고 당시 볼프강 티어제는 평가했다. 또 반대로 동독에서는 ‘지친 기색이 확산되어 있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생존에 대한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고 했다. 자기들만이 도덕적으로 깨끗하다고 거들먹거리는(로버트 라이히트) 서독 사람들에 부아가 난 동독 사람들은 그들을 ‘잘난 척하는 배씨’라 부른다. 반면 ‘한숨쟁이 오씨’는 호네커 시절이 지금보다 훨씬 좋았다고 지칠 줄 모르게 강조하고 있다.
뒷이야기- 우리는 독일 통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통일은 환상이 아닌 현실이다.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도 지적하고 있듯이, 통일에 대해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 막연한 환상은 금물이다. 문제는 방법이다. 1. 무력통일 2. 흡수통일 3. 평화통일. 우리는 과연 어떤 통일을 해야 하나. 3번이다. 중요한 것은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남한정부는 북한정부를 도와야 한다. 진실로 북한의 경제를 도와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금 쌀이 남아돌아가고 있다. 굶주리고 있는 북한 동포들을 기꺼이 도와야 한다. 그리고 경제와 더불어 남북한의 정신적 장애물도 동시에 치료를 해야 한다. ‘오씨’ ‘배씨’를 거울삼아 그 장애를 지금부터 천천히 걷어내어야 한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북한을 경제적으로 돕는 일이다. 통일비용이라 생각하고 북한을 도와야 한다. 201076도노강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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