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화두

혁명만이 살길이다-협동조합 녹색혁명

오주관 2013. 6. 21. 16:30

 

 

 

도전, 그것은 창조!

지난 달 5월 20일 아침 10시, 배낭을 멘 나는 다시 지방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세 번째 도전을 위해 길을 떠난 것이다. 집을 나서는 나에게 옆지기가 문자를 보내왔다.

 

큰 그림 하나 그려 오세요.

 

내가 가지고 있는 무기는 인문학적 지식과 상상력이다. 반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최대 약점이자 단점은 인적 네트워크와 인프라가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이 사라져버렸다. 늘 나 혼자뿐이었다.

 

1980년대 충무로에 필하모니라는 음악감상실이 있었다. 종로의 르네상스와 어깨를 같이 한 고전음악감상실. 그때 그 감상실에 단골 랭킹 10위 안에 들 정도로 음악에 빠져 지낸 시절, 그곳의 막내격인 아이가 하나 있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H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을 한 그 아이가 어느 날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형님, 형님을 위해 제가 호를 하나 지었습니다. 그래? 네. 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독 청.

 

독청? 네. 홀로 독, 푸를 청. 누가 이름을 함부로 짓는가? 호도 마찬가지다. 막내인 그가 나를 꿰뚫어본 것이다. 독청. 홀로 독, 푸를 청.

 

 

 

도전을 향해 길을 떠나다

2013년 들어 두 번째 지방행이었다. 첫 번째는 울진이었다. 원전 반대론자인 내가 찾아간 곳은 원전2기를 건설하는 울진이었다. 척추와 혈압을 중점적으로 보는 검사를 겨우 통과한 나는 그 현장에서 죽을힘을 다해 일을 했다.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우리 나이로 환갑인 나. 이장희 씨의 노래가 있다.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

 

61과 58의 싸움

처음 보는 58밀리 철근. 킁! 들어지지가 않았다. 용을 써 들려고 하면 항상 허리는 누구를 향해 읍을 하는 자세가 되었고, 눈알은 늘 앞을 향해 튀어나가려고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그 철근과 싸우면서 다시 한 번 느낀 것이 있었다. 이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58밀리 철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장인 1미터 80에 8년차인 38살짜리 꺽다리는 나를 향해 눈알을 부라리며

 

허리를 세우고 바짝 들어!

 

두 명은 거뜬히 드는데 나 혼자만 허리를 펴지 못한 채 낑낑대며 사투를 하고 있었다. 28년 경력을 가지고 있는 1미터 60의 반장은 저만치에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러다 똥 싸지. 똥은 싸지 않아도 들 수는 없었다. 들어지지가 않았다. 땀. 서 있는데 닭똥 같은 땀이 비 오듯 얼굴에서 쏟아져 내렸다. 손은 아사풍 걸린 사람 모양 덜덜덜. 동료인 노동자들이 그냥 노동자로 보이지 않았다. 위대해 보였다. 저들을 절대 무시하지 않으리. 저들의 저 노동은 참으로 값지고 신성하다.

 

 

 

철근일의  끝

삼일 째 밤, 잔업을 할 때 사고가 찾아왔다. 구멍이 숭숭 뚫린 철근 위로 걷기도 불편한데 원통으로 된 철근을 굴리며 가는 일은 나에게 쉽지 않았다. 합! 정신에 기합을 주며 굴리고 가다 그만 발 하나가 철근 사이로 쑥 빠지는 바람에 원통이 넘어지면서 내 머리를 쳤는데, 탕! 하고 벼락 치는 소리가 났다. 순간적으로 아, 골로 가는구나 싶었다.

 

다행히 죽음은 피해갔다. 대신 철모를 때리면서 흘러내린 원통이 내 귀를 쳤는데 순간 찢어지는 아픔이 찾아왔다. 얼른 장갑을 벗고 귀를 만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손바닥에 붉은 피가 흥건했다. 소름이 끼쳤고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런데 동료들의 표정은 전과 동이었다.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어이, 빨리 일어나 원통이나 굴려라. 분위기가 응급실에 갈 입장은커녕 귀를 살필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로 한 달 동안 내 귀는 당나귀 귀가 되어 있었다. 만약 갑이 다쳤다. 아마 그날 밤 헬기가 금방 두두두 떴을 것이다. 을은 반기를 들면 안 된다. 심판은 항상 갑의 몫이다. 을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뿐이다. 똑똑해지는 것, 그리고 혁명의 깃발을 높이 드는 그 일이다. 일어난 체룰은 다시 원통을 굴렸다.

 

 

 

포기, 그리고 항복!

왕자의 신분을 포기하고 구도자의 길에 들어선 싯다르타를 두고 위대한 포기라고 했다. 3일째 되는 날, 나는 드디어 두 손을 들었다. 포기였고 항복이었다. 다시 배치 받은 곳은 타설. 하루 이틀은 편했다. 철근 일을 하면서 떨어뜨린 철사 부스러기 같은 것을 줍는 일을 할 때는 쉬웠는데, 6미터 파이프를 어깨에 메고 7미터 높이의 경사가 급한 계단을 올라가는 일과 타설을 할 때는 그게 아니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타설을 하던 마지막 날 밤, 액션 줄을 대주고 있던 나는 두 번 철근 사이에 다리가 빠졌다. 그런데 두 번째 빠진 다리를 빼면서 각도가 맞지 않아 다리가 어긋났다. 인대가 늘어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부터 다리가 아파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엑스레이 촬영 결과 더 이상 노동은 불가능했다. 결국 한 달 만에 나는 울진을 떠나왔다. 한 달 동안 하루도 안 빠지고 일을 한 대전에서 온 유씨, 그도 그 현장을 나보다 하루 먼저 떠나갔다. 두 손이 탕탕 부어 철근을 더 이상 들 수가 없었다. 첫날, 58밀리를 들다 기합을 잘못 주는 바람에 뚝! 하고 갈비뼈가 나간 사람, 요령 없이 철근을 들다 손목의 인대를 다쳐 현장을 떠난 사람, 토토에 빠진 젊은이는 딱 하루 일을 하고는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소주 세 병과 밥값 3일치를 못 받은 사장은 속으로 에이 개새끼 같은 놈! 하고 분을 새겨야 했다.

 

 

 

두 번째 길을 떠나다

지난 5월 21일, 내가 찾아간 곳은 김천의 어느 쌈농장. 그곳 현장에서도 나는 비지땀을 흘리며 일을 했다. 일은 서툴려도 최선을 다한다. 그곳 현장에서의 어려움은 두 가지. 하나는 육판대감들과 채식주의자의 부조화, 두 번째는 소통. 고단한 노동일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그들은 고기부터 지글지글 굽는다. 막창과 삼겹살과 닭 그리고 고기라는 고기는 다 동원된다. 지글지글 구으면 그들의 소주 파티는 시작된다.

 

나는 한 달 동안 쌈만 먹었다. 아침에도 쌈, 점심에도 쌈, 저녁에도 쌈. 다행히 나보다 하루 늦게 온 박이 나를 지지해 주었다. 며칠 후 주방 일을 하게 된 박불행, 대구의 어느 공고를 졸업한 그는 포항제철과 현대자동차에 오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좋은 귀족노동자 클럽에 가입을 하지 않았단다. 운이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한 그 말은 사실이었다. 기회는 너무 짧아라! 그 좋은 호시절이 다 지나가고 찾아온 불행. 사과 장사, 양말 장사, 그리고 사설경마에까지 도전을 했지만 남은 것은 빈 지갑. 하사관시절 족구를 너무 해 관절을 다쳤다고 하지만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쨌든 관절까지 안 좋아 뻐청 다리를 한 채 전단지를 돌리며 여관방에서 보내다 쌈농장에 온 그. 나는 그런 그를 박불행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박불행은 나를 위해 자주 시래깃국과 쑥국을 끓여주기도 했다. 농장을 쫓겨나간 그날도 박씨는 육판대감들을 위해서 곰탕과 닭도리탕을, 나를 위해서는 시래깃국을 한 냄비 끓여놓고 떠나갔다.

 

소통도 마찬가지였다. 술과 담배 그리고 여자 이야기가 전부인 그들과의 소통은 처음부터 벽이었다. 노동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노동은 인내할 수 있지만 소통은 그게 아니었다. 유전인자보다 더 중요한 것이 환경인자다. 그 간격을 좁힐 길이 없는 나는 밥만 먹고 나면 컨테이너 내 숙소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내 옆방의 길림성에서 온 중국인 위씨도 마찬가지였다. 가끔씩 필답을 주고받으며 의사소통을 하곤 했지만 어려움은 많았다. 간자체를 주로 사용하는 그는 내가 쓰는 한자를 모를 때가 많았다. 서울은 몰라도 한성은 아는 그. 그는 배려가 뭔지를 모르는 중국인이었다. 중화민국의 자긍심 하나만 살아 있는 그. 하루는 하도 화가 나 무슨 말 끝에 이 뙌놈! 이라고 했더니 그 말은 기가 막히게 알아듣고 노발대발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를 돕는다는 것을 비로소 인식을 하고난 후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그.

 

 

 

드디어 세 번째 큰 그림을 그리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한 달 동안 농사일을 하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큰 그림 하나였다. 농사만 지은 게 아니었다. 사이사이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달 끝에 드디어 밑그림이 완성되었다. 고뇌 끝에 나온 그것은 바로

 

협동조합 녹색혁명

 

옆지기도 만족했다. 대단하네요. 이제 큰 그림을 받쳐 줄 기둥을 세우는 일만 남았다. 전국을 다니면서 장인과 명인들을 찾아내 협동조합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식품회사가 하나 있다. 아마도 내가 그린 그림이 완성이 되면 단언컨대 그 회사를 단번에 넘어설 것이다. 그리고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전에, 진실로 필요한 일은 동지를 만나는 일이다. 나와 함께 목숨을 걸고 그 일에 뛰어들 동지를 만나는 일이다. 사익이 아닌 공익을 뛰어넘어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그 일을 같이 할 동지.

 

 

 

체 게바라와 룰라

며칠 후 나는 다시 길을 떠날 것이다. 인적 네트워크와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세 번째 길을 떠날 것이다. 문제는 어디에 가야 혁명을 할 동지를 만날까? 체 게바라와 룰라는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혁명적 사업을 위해 나와 반드시 만나야 한다.

 

나는 진실로 그들을 만나고 싶다. 나와 하루빨리 손을 잡고 그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 먼 훗날 역사는 반드시 우리를 기록할 것이다. 그들이 있어 우리는 행복했다고.

 

 

뒷이야기-19일 아침, 대구에서 버스로 7시간 걸려 속초까지 온 나는 찜질방에서 일박을 했다. 이튿날 무궁화 기차를 타고 7시간 올아오면서 내내 생각한 것은 협동조합 녹색혁명이었다. 나의 도전은 계속 진행 중이다. 우리 한반도를 평화적으로 통일시킬 DMZ PROJECT와 아주 적은 돈으로 우리나라 아이들의 말문을 열어 줄 오조영어나라. 그리고 세 번째 도전인 협동조합 녹색혁명. 나는 생각한다. 행복과 불행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돈이 많은 사람일까? 권력일까? 아니면 명예일까? 돈도, 권력도, 명예도 아니다. 주제가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한마디로 주제가 없는 사람이다. 열정보다 더 무서운 꿈을 위해 나는 오늘도 내일도 아마 아무도 걷지 않는 가시밭길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나는 간절히 찾고 있다. 나와 손을 잡고 혁명을 할 동지를.2013621도노강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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