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

5, 600Km를 걷다

오주관 2022. 1. 18. 13:24

 

 

 

 

 

 

 

 

 

 

 

 

 

 

 

 

걸으면서 얻는 것과 버리는 것

 

일요일 집사람과 함께 7코스를 걸었다. 여자, 바람, 돌이 많은 제주. 강정 바닷가로 들어서자 바람이 얼마나 거센지 몸이 휘청휘청했다. 해군기지 동네를 지나는데 미국 대통령 부시와 종친이라고 자랑을 한 10년 전 부씨 어른들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의 정의는 변화다. 내가 점 찍어 놓았던 카페 하나가 문을 닫았다. 코로나19 때문일까 3층짜리 큰 카페가 폐쇄된 채 빈 건물만 바람을 맞고 있었다. 사실 그 카페에 들어가 오랜만에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가 읽은 책을 놓고 토론을 하기로 했었는데. 큰 카페를 뒤로 하고 걸어가자 작은 카페가 나타났다. 나 혼자 걸으면 비싼 커피는 안 마신다. 집사람이 있어 비싼 커피를 마셨고, 그리고 잠시지만 여러 가지 생각에 빠졌었다.   

 

 

옛날 고향 오천면에 살 때의 일이다. 미군부대와 해병1사단 전기공사가 끝난 아버지는 그 때부터 농부이었다. 그리고 겨울방학만 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황사골로 나무를 하러 가시곤 했다. 용덕동 집에서 오어사 인근의 황사골까지는 대충 20리는 넘지 않을까 생각한다. 

 

소쿠리에 담긴 삶은 보리쌀을 냄비에 담아 고추장에 비벼 형과 나누어 먹는다. 배를 채우고 물에 담아놓은 새끼줄을 탈탈 틀어 옆구리에 끼고 집을 나오면 종렬이네 보리밭에는 친구들이 공을 차고 있다. 새끼로 똘똘 감아 만든 공이라 차도 멀리 가지 않는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아 열정적으로 땀을 흘리며 찬다. 보리밭에서는 친구들이 땀을 흘리고 있고, 황사골로 떠나는 형과 나는 칼바람을 피하기 위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종종 걸음으로 나아간다.

 

겨울방학 내내 황사골로 오가면서 나는 무엇을 얻었고, 버렸나. 새끼를 옆구리에 끼고 올라갈 때도 고통이었고, 나뭇단을 지고 집으로 올 때의 시간도 고통 그 자체였다. 칼바람 자체가 고통이었고, 나뭇단을 지고 걸어가며 내뱉는 가쁜 숨소리와 땀, 그리고 어깨를 짓누르는 그 아픔도 고통이었다. 

 

황사골에서 우리집까지 가려면 8번 정도 쉬어야 도착하곤 했다. 내가 진 나뭇단은 20Kg 정도였고, 형은 30Kg, 아버지와 어머니는 60kg 정도 되지 않았을까. 모든 게 악조건이었다. 신발이 좋나, 나뭇단의 어깨걸이가 좋나, 입고 있는 옷이 좋나? 운동화는 밑이 딱딱했고, 옷은 추위를 막을 만큼 좋지 않았고, 나뭇단의 어깨걸이는 새끼줄이라 어깨가 여간 아프지 않았다.

 

고난의 강행군이 시작된다. 아버지가 맨 앞에 서고 그 뒤에 형, 그 다음이 나이고 맨 뒤에 어머니가 따라오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맨 나뭇단이 너무 무거웠다. 생 소나무라 더 무거웠다. 나는 자주자주 앞을 쳐다보면서 우리가 가닿아야 할 집을 눈으로 찾고 있었다. 황사, 오어사, 문충, 해병부대, 세계동, 시장, 극장, 공의, 오천국민학교, 정미소, 우물, 그 다음이 우리집이다. 쳐다보면 까마득했다. 볼 때마다 고통은 배가 되고 어깨는 점점 내려앉곤 했다. 그런 어느 날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

 

"야야, 먼 길을 갈 때는 앞을 보지 말고 땅만 보고 걸어야 한다."

 

순간 나는 아, 했다. 돈오돈수 그 찰나의 벼락이 찾아온 것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돈오점수의 인내의 도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나는 땀과 고통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희망과 행복이 어디서 싹을 틔우고 오는지 보았고 안 것이다. 까마득한 길과 무거운 나뭇단이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8번 쉬고 나서야 도착한 집. 깜깜한 집에 도착한 어머니는 전깃불을 켜고 부엌에서 늦은 저녁밥을 짓는다. 잠시 후 부엌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을 열려진 쪽문을 통해 바라보면서 느낀 평화와 행복. 그 달콤함은 너무 깊고 넓었다. 

 

지금까지 나를 강하게 단련시킨 도장은 도서관과 길이었다. 도서관에서 길을 찾고, 길에서 꿈을 잉태시키고, 키우고, 설계를 하고, 그리고 마침표를 찍곤 했다. 배낭을 메고 길을 걸으면 나는 늘 행복하다. 내 존재이유와 목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 집사람은 종종 중고 차를 하나 사자고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사지 마라고 한다. 물론 개똥이 소똥이도 가지고 있는 차가 있으면 편리한 점은 많다. 기동성과 편리함이다. 그러나 너무 빨라 놓치는 게 많다. 주변의 풍경을 놓치고, 사색을 놓치고, 건강을 놓친다. 불편해도 걸으면 일석삼조다. 건강과 사색, 그리고 풍경을 마음에 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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