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

작가 김성동, 우리 곁을 떠나다

오주관 2022. 9. 29. 14:52
 

아! 김성동... 기적처럼 살다 날아간 '병 속에 갇힌 새'

문인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곡기 끊고 마지막 원고 교정에 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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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성동

소설가 김성동씨의 눈을 보면 맑으면서도 깊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은 그리고 막막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산에 들어가 중이 된 것도, 그리고 환속을 해 소설가로 변신을 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불행한 가족사에 있다. 그 씨앗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시작이 된다. 그 업이 그가 평생 천착한 병 속의 새가 된다. 그 화두는 죽을 때까지 그를 따라다닌다. 시대의 이념이 처놓은 병 속에 갇힌 그. 그 병 속에서 그는 하루도 자유롭지 못한 채 병을 깨고 나오기 위해 혼신을 다한다. 

그해 가을, 직장에 사표를 내고 나온 나는 광화문의 숲속이라는 스탠드바에 살다시피 했다. 커피와 술을 파는 그곳에 문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그 바에서 작가 김성동씨를 만났다. 그 날 밤 우리 세 사람(작가 최학)은 대취했다. 최학 씨로부터 들은 이야기 하나. 수학점수 30점으로 고대 국문과에 들어간 그. 교수가 면접을 보면서 "니, 수학 30점 묵고 들어와 공부할 수 있겠나?" 그 말을 들은 최학 씨가 "교수님, 수학만 못 하지 다른 과목은 잘 합니더. 걱정 안 해도 됩니더." 그의 말 대로 최학 씨는 고대를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다고 했다. 바를 나온 우리는 택시를 타고 헤어졌다. 다행히 나와 김성동씨는 같은 택시(포니)를 탔다. 나는 신정동의 칼산, 작가는 화곡동. 칼산 입구에서 내린 나는 뒷좌석에 자고 있는 작가를 보며 기사아저씨에게 부탁을 했다.

"아저씨, 저 분이 만다라를 쓴 작가입니다. 화곡동까지 잘 모셔주십시오."

"아, 그러세요? 네, 잘 모셔드리겠습니다."

그 날 밤 작가 김성동씨와의 그 만남이 시작이자 끝이었다. 그 후로는 지면을 통해 그의 소식을 보곤 했다. 작가 김성동. 그는 죽는 그 날까지 자신의 에너지를 다 쏟아부으며 혼신을 다해 산 작가였다. 문학에 한 획을 그은 그는 너무 일찍 이 가을 우리 곁을 쓸쓸히 떠나갔다.  

고백

스물아홉의 나이, 잘 나가던 보험회사를 때려치우고 사표를 내게 한 사람은 바로 작가 김성동씨였다. 그때 만다라는 소설을 읽는 게 내 낙이었다. 또하나 만다라는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 정신이 울퉁불퉁 일어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짧은 글을 쓰곤 했다. 그 무렵 유명 소설가의 책을 발간한 출판사 편집부에 다니고 있는 한 아가씨를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아가씨에게 내가 쓴 글을 가끔씩 보여주곤 했다. 그때마다 그 아가씨는 커피와 술을 사주면서 나를 부추기곤 했다. 

"소설을 한번 써보세요? 글이 괜찮아요."

그럴 때마다 내 정신은 고삐가 풀리곤 했다. 

"한번 도전해봐!"

그런 내가 글을 접은 것은 그놈의 랭킹이었다. 내 마지노선이 10위였다 어느 날 나는 곰곰 생각했다. 내가 만약 글을 쓰면 대한민국 소설가들 중에 몇 위에 들어갈 수 있을까? 5위까지는 꿈을 못 꾼다 해도 그럼 10위 안에는 들어가나? 브레이크가 풀린 채 쾌속질주를 하고 있는 그들을 떠올렸다. 박경리, 조정래, 김지하, 황석영, 이문구, 김승옥, 최인호, 이문열, 김성동 등등. 솔직히 기름을 짜도 나는 못 들어간다. 내 자신을 객관화시켜 보았을 때 나는 자신이 없었다. 치우자! 골로가기 전에 포기하자! 포기는 큰 용기다. 어느 날 나는 그렇게 소설가라는 집단에서 탈출을 했다. 소설에서 빠져 나온 나는 피가 뜨거운 혁명가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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