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어머니에게 가다
6월 6일 현충일 아침 우리 두 사람은 어머니에게 갔다.
어머니의 94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6월 4일 형님네와 조카들이 모여 케이크를 자르며 생일잔치를 치렀다고 형수가 전한다.
증손자 다니엘까지 와서 재미있게 하루를 보낸 모양이다.
집사람이 동네 파리바케트에서 산 케이크와 마늘 바게트.
이 땅의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들의 자식 사랑은 똑 같다.
진자리 마른자리를 늘 갈아주고,
신발이 다 닳도록 희생과 인내 헌신이라는 그 정신으로 우리 자식들을 키웠다.
우리를 낳아주고 키워 주신 부모님은, 위대한 영웅들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거한 유산
우리 집의 기둥이 무너져 내린 것은 내부가 아닌 외부의 적들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군 재산을 친가와 외가에 다 잃어버렸다.
해병 1사단 바로 밑 청림동의 섬이라고 부르는 그곳에 있었던
논 일곱 마지기는 큰 외삼촌의 군 징집을 피하기 위해 어느 해 그렇게 날아갔다.
그 섬 논 한켠에는 찬물이 나오는 샘이 하나 있었고,
그 샘 위로 올라가면 비행장이 있다.
그 언덕에서 삘기와 찔레순을
뽑아 먹고 꺾어 먹곤 했던 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형은 군의 징집을 피하기 위해 우리 논을 팔아 해결을 했는데,
그 밑에 막내는 중학교 2학년 때 학도병으로 포항전투에 참가를 해 전사를 했다.
지금 동작동 국립묘지 무명용사비에 막내 외삼촌이 있다.
후에 우리 논을 팔아 징집을 면한 큰 외삼촌은,
평생 공자왈 맹자왈만 읊다
어느 해 비가 많이 내리던 날 도로를 건너가다 뺑소니차에 치여 삶을 마감했다.
해병 1사단 용덕동 남문 밑에 있던 노른자위 밭 250평은
해병대 군인들의 주택을 짓는다고 어느 해 국가가 반 강제로 매입을 했다.
그 밭을 판 돈이 요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막내숙부가 형님, 형수님, 밭을 판 돈을 제 친구가 설립을 한 서민금융에 넣읍시다.
형님의 재산을 불려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돈을 맡긴지 얼마 안 가 숙부의 친구가
부도를 내고 도망을 가는 바람에 다 날아가 버렸다.
그때 논과 밭을 끝까지 손에 움켜쥐고 지낸 동네 분들은
한동안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고, 그리고 똥깨나 뀌며 그 동네에서 널널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는 살아생전 한 번도 친가와 외가를 향해 분노를 터뜨리지 않았다.
한 번쯤은 동생과 처남을 향해 화를 낼 법도 한데, 그런 분노를 표현하는 걸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아버지 당신이 피와 땀을 흘려가며 일군 재산을 다 잃으시고도.
아버지가 우리 자식에게 물려준 유산은 정직이었고, 그리고 부지런함이었다.
비료 한 포 쓰지 않고 똥물로 밭농사를 다 지으신 분이었다.
크게 두 번 재산을 잃고 나자 더 이상 재기는 없었다.
기울어진 집을 일으켜 세운 분은 어머니였다.
어머니 자신의 DNA인 의지와 열정 그리고 도전정신으로
우리 집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일어나 앞장을 서곤 했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의지와 열정 그리고 도전정신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나는 집을 나와 이글거리는 태양을 머리에 받으면서
한교장님 사과농장을 지나 어머니가 일을 하고 있는 강변으로 갔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강변 저편에 흰 천 하나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 어머니가 임시로 나뭇가지 네 개에 천을 매달아 쳐 놓은 천막이었다.
어머니는 그 천막 아래에서 호미로 강변의 작은 돌들을 모으고 있었다.
모은 돌이 이미 군데군데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저녁이 되면 트럭이 와 그 작은 돌무더기를 실어가는 것이었다.
아마 공사장에 쓸 돌인 것 같았다.
땀이 비 오 듯 하는 어머니의 얼굴.
아침에 집에서 가지고 온 주전자의 물은 이미 더워져 있었다.
그 주전자 옆에는 주먹밥이 두 어 개 있었다.
어머니는 주먹밥을 가리키며 먹으라고 했다.
당신은 먹지도 않은 주먹밥을.
나는 천막 밑에 앉아 어머니의 주먹밥을 먹곤 했다.
지금도 그 생각을 떠올리면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아픔이 뒤따르곤 한다.
어머니의 그 주먹밥을 내가 먹다니!
그리고 겨울방학
동네 친구들은 보리밭에서 이미 보리를 밟으며 축구를 하고 있었다.
새끼로 만든 공이기는 해도 편을 나누어 고함을 지르며 상대방의 골문을 향해 전력질주를 하고 있을 때,
형과 나는 부엌의 소쿠리에 들어 있는 보리쌀을 삶은 보리밥을 양푼에 담아 고추장에 비벼 먹는다.
한 번 삶은 보리라 꼬들꼬들했지만 먹을 게 그것뿐이면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한 그릇을 비우고는 아침에 물에 담가놓은 새끼를 둘둘 말아 어깨에 지고는
이십 리 넘어 오어사 옆 황사골을 향해 하념 없이 걷기 시작한다.
아마 두 시간 정도 걸을 것이다.
지옥은 항상 그 다음이다
오후 3시쯤 도착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뭇짐을 다 옮겨놓고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가 오면 그 때부터 산에서 해온 나뭇단을 네 무더기로 나누는 작업을 한다.
그 작업이 끝나면 각자 집까지 지고 갈 나뭇단을 어깨에 메고 일어난다.
마른 갈비가 아닌 물거리인 생나무 소나무라 무겁다.
어림잡아 20Kg 정도 나간다.
이제부터 행복 끝, 고생, 시작이다.
형이 앞에 서고, 그 뒤에 내가 서고, 내 뒤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따라온다.
집까지 가려면 8번 정도 쉬어야 도착한다.
미치지 않고 간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앞을 보면 늘 깜깜하다.
무엇이 나를 가로막고 있나?
두려움과 절망이 내 앞길을 항상 막아서곤 했다.
아이구, 이 무거운 나뭇짐을 지고 집까지 언제 가노…
그 두려움과 절망에 몸을 바르르 떨고 있을 때 뒤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야, 어예든지 앞을 보지 말고, 땅만 보고 걸어라.
땅만 보고 걸어라?
어머니의 그 말뜻을 이해를 하기 시작한 건 세 번째 지고 간 날이었다.
그래, 맞다!
앞을 보면 깜깜이라 못 간다, 무조건 땅만 보자.
땅만 보면서 가는 거다.
두 번, 세 번, 이제 겨우 문충이다.
입에서 벌써부터 단내가 난다.
겨울인데 얼굴과 몸에서 땀이 나온다.
네 번째 쉰다.
필승!
귀신도 두드려 잡는다는 전국 팔도에서 온 가다들이 빨강 명찰과 빨강 모자를 쓴 채
정신을 일도해 타당 타당! 사격을 하는 사격장이다.
다섯 번째.
이놈의 길이 왜 이렇게 기노!
어깨가 빠개질 것 같다.
여섯 번, 내 반 친구 몽옥이 아버지가 원장으로 있는 공의(공중보건의)앞이다.
똘똘한 몽옥이가 나를 보면 뭐라고 할까?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고 했다.
고생 끝에 만나는 천국.
휴, 일곱 번째.
내 친구 호야네 정미소다.
내 위를 잠시나마 즐겁게 만드는 식량보급소.
정미소에 갈 때마다 맨 마지막에 쌀이 되어 나오는 그 구멍에 손을 집어넣어
한 주먹 쌀을 꺼내 후후 불어 쌀겨는 날려 보내고 남은 생쌀을 참 많이도 씹어 먹었다.
드디어, 호야네 집이 자나갔고, 동조네 집이 지나갔고, 오, 그리운 우리 집이다.
마당에 온 나,
나는 내가 지고 온 나뭇단을 진 채 뒤로 털썩 주저앉는다.
땀범벅인 얼굴로 숨을 내쉬며 쳐다본 밤하늘.
반짝반짝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머릿속이 노랗게 비어 있다.
기진맥진이라는 단어를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미 알았다.
중학교 여름방학
어머니와 나는 공동묘지 위의 콩밭을 메고 있었다.
해발 120고지 정도 되는 콩밭은 뜨거운 태양이 머리 위에서 이글이글 타고 있었다.
삼다수는커녕 마실 물조차 없는 더운 콩밭을 매면서 나는 자주자주 콩밭의 끝을 바라보곤 했다.
200평이나 되는 이 콩밭을 언제 다 매고 집에 가나?
건너편 저 아래에는 푸른 동해바다가 나를 향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간,
내 친구들 중 더러는 몸을 오들오들 떨면서 뜨겁게 달구어진 바위에 엎드린 채
차가운 몸을 덥힐 것이고,
더러는 뿌굴뿌굴 잠수를 하며 누가 더 깊이 들어가나 손과 발을 마구 휘저으며
죽을힘을 다해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더위와 싸우며 호미를 쥔 채 이 길고 긴 콩밭을 언제 다 매나,
그 생각에 잠겨 절망하고 있는 바로 그 때,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
야야, 일은 손이 하지, 눈이 하는 게 아니다!
나는 호미를 쥔 채 가만히 있었다.
야야, 일은 손이 하지, 눈이 하는 게 아니다.
하!
생각해보니,
나는 두 번 알을 깨고 나왔다.
어머니의 그 가르침을 받고 나 자신으로부터 두 번 태어난 셈이다.
야야, 앞을 보지 말고, 땅만 보고 걸어라!
야야, 일은 손이 하지, 눈이 하는 게 아니다!
어머니의 의지와 열정은 대단했다.
집이 어려움에 빠질 때마다 어머니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느 날 새벽 일어나 보니, 어머니의 존재가 보이지 않았다.
새벽에 길을 떠난 어머니는 그 먼 대구 서문시장에 가
양말과 속옷을 한 보따리 도매로 사 와 포항 죽도시장 난전에서 팔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죽도시장 신발가게 3층의 방을 두 개 얻어 우리 남매를 데리고 나왔다.
바야흐로 포항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어머니의 마지막 가르침
경주 분교에 내려가 살 때,
서울에서 내려온 어머니는 보름 정도 나와 같이 생활을 하고 올라갔다.
분교의 큰 방에는 박스가 한 가득이었다.
박스 안에 있는 책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큰방 대신 건너편의 작은방에서 생활을 했다.
870여 명을 배출한 권위분교에는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그 마을에 사는 아가씨 하나가 분교의 남선생님을 몰래 짝사랑하며 몸을 태웠다고 한다.
짝사랑은 성공하지 못 한다.
혼자 가슴앓이를 하며 끙끙 앓던 어느 토요일,
남선생님은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갔다.
혼자 남은 아가씨는 밤에 몰래 남선생님이 살고 있는 방에 들어와 그만 목을 매고 자진을 한다.
그 슬픈 역사를 알 길이 없는 나는 그 방에서 달고 깊은 잠에 빠져 지낸다.
그 사실을 안 것은,
분교를 나오는 그 날 아침, 아침밥을 먹자며 데리고 간
그 동네의 개발위원과 그의 부인이 아침상을 물리고 커피를 한 잔
마시며 비로소 그 비밀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아가씨가 나를 지켜준 것이다.
어쨌든 어느 날 어머니가 나에게 말했다.
야야, 저 책을 다 버려라!
나의 전부인 저 책들을 버리라고 한다.
버리지 않으면 니 죽는다.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아, 어머니가 나의 정신세계를 읽고 계시구나.
만약 그 때 그 책들을 버리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도 죽었을 것이다.
한 트럭의 책을 다 버렸다.
다 버리고 나는 살아났다.
그 해 어느 종파의 종정스님이 자신의 방에서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처사님, 처사님은 3년 안에 급사할 것입니다.
나는 스님을 바라보았다.
아, 이 스님이 지금 나의 안과 밖을 읽고 있구나!
사실 그 무렵의 나는 끝에 와 있었다.
백척간두 그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나뭇가지 하나를 잡고 있는 나를 어머니와 그 스님이 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스님, 제가 저를 한 번 다스려보겠습니다.
하루에 다섯 여섯 번씩 심장이 마비가 되곤 했다.
지금 서울구치소에서 심장이 스톱할까 잔뜩 겁을 먹고 있는 김기춘 나리가
판사를 상대로 가석방을 좀 시켜달라고 애걸복걸하고 있다.
여보 김영감, 칠십하고 팔년이나 산 당신은 심장이 정지해 죽을까 싶어 그게 걱정이요?
당신이나 당신들 패거리를 바라보는 우리 국민들은, 당신들이 재판을 받으러 나올 때마다
치오르는 분노 때문에 언제 심장이 터져버릴지 그게 걱정이요.
그 때의 나는 김기춘이 같은 악마는 저리 가라였다.
여차, 하면 나는 북망산천에 직행할 운명이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하루에 다섯, 여섯 번씩 심장이 얼어붙곤 하는 그 전쟁터에서 나는 다시 살아 돌아왔다.
나는 불사신일까?
오늘 아침 어머니에게 가다
오늘 아침 나는 쇠고기 버섯죽을 한 그릇 사 어머니에게 갔다.
반 그릇을 비운 어머니.
세 시간을 어머니와 보냈다.
세 시간 동안, 나는 어머니로부터 배운
끈기와 인내심을 발휘해 수다를 마구 늘어놓았다.
어머니에게는 자식과의 대화가 약이고 보약이다.
나오기 전, 어머니 손을 잡고 내가 말했다.
어머니, 제가 힘이 들 때마다 어머니를 보면 힘이 납니다.
사는 그 날까지 용감하게 삽시다.
그래.
또 기가 떨어지면 올게요.
오야.
뒷이야기-이 땅의 어머니들은 모두 위대하다. 헌신, 의지, 열정, 인내가 우리 어머니들을 광야에서 우뚝 일으켜 세웠다. 어머니의 존재는 바로 나의 존재이고, 이 세계다. 어머니를 함부로 버리지 마라. 아버지를 함부로 버리지 마라. 어머니를 함부로 홀대하지 마라.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혜는 하늘이고 땅이다. 2017610해발120고지아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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