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

어제 대학로에 가다

오주관 2017. 11. 6. 14:14



지난 5개월,

나는 한 프로그램에 미쳐 지냈다.

도서관에 앉아 이 세상을 다 뒤지고 다녔다.

WHO에도 들어가 내가 얻고자 하는 정보가 있나, 뒤졌다.




언제인가 고인이 된 작가 최인호 선생의 글이 떠올랐다.

원고지 한 장을 쓰는데, 10장 20장 정도의 원고지를 버린다고 했다.

언어마술사라는 소리를 들어도 괜찮을 선생이,

얼마나 많이, 그리고 자주 퇴고를 하는지 나중에 그 단편이 출판되어 나오면

아예 보지를 않는다고 했다.

꼴도 보기 싫다고 했다.

 



내가 바로 그렇다.

A4 용지 10장 정도의 프로그램을 완성시키는데,

장장 5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10장을 건지기 위해

내가 찢어버린 용지를 다 모으면 한 리어카 정도 되리라.

프린터값만 해도 한 두푼이 아니었다.

혹시 새와 쥐가 물어 가나 싶어,

하루에,

두 번, 세 번 짝짝 찢어버리곤 했다.

인내심이 없으면 이런 일을 못 한다.

구글을 만들 때,

 레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도 그렇게 007작전을 펼치 듯

기밀을 유지하며 구글을 완성시켰다.

현대는, 정보가 돈이다.

4차산업은 더더욱 그렇다.




내가 도서관을 나와 두번째이자 마지막 땀을 식히는 곳.

하루 1만 3000보 정도 걷는다.

겨울에도 집에 도착을 하면

온몸이 땀에 젖어 러닝셔츠를 벗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이다.

여름은 말해 무엇하리.




옆지기가,

 감기에 걸려버렸다.

채식을 하고 우리 두 사람은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독감이 풍년이어도 우리 두 사람에게는 해당 무였다.

그런데 이번에 살짝 감기가 붙었다.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나가지 않고 집에서 쉬었다.

아니, 잤다.

오후 4시에 몸을 일으킨 우리는, 나가자고 했다.

누워 있으면 몸이 더 깔린다.

영화라도 보자, 하고 대학로에 왔는데 시간이 맞지 않았다.

저녁을 먹자고 하고 식당을 살폈는데 두군데가 걸렸다.

일본식가정식을 파는 식당은 줄이 까마득했다.

메뉴를 보니 고기가 주였다.

한국식 가정식이 아니었다.

나물이 올라오고, 두부가 올라오고, 얼큰한

청국장이 올라오는 줄 알았는데, 고기를 튀긴 게 주메뉴였다.

다른 한곳은 일본식 돈가스였는데, 이 집도 줄을 서는 집이다.

두 집, 탈락.

전국에서 10번째 잘하는 짬뽕집에 들어가 나는 자장면,

옆지기는 짬뽕을 먹고 대학로 마로니에 갔다.




내가 혼을 바쳐 만든 그 프로그램이 며칠 전,

영어전문번역가에게 갔다.

번역작업이 끝나면 편지번역이 있다.

그 작업이 끝나면 프로그램과 편지는 마침내 그들에게 날아간다.

세 사람이다.

그 세 사람은 21세기 우리 인간의 정보와 문명사를 바꾼 혁명가이자, 혁신가이다.

그리고 그 세 사람은,

전 세계 젊은이들의 꿈과 희망, 도전정신과 열정, 그리고 창의력과 혁신의 아이콘이다.




지난 5개월,

내가 받은 스트레스는 한라산보다 더 높고 컸다.

벽 하나를 넘으면 또 벽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투자라는 벽을 넘으면 더 이상 넘을 벽은 없을까?

아니다.

또 다른 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경영이라는 난제가.

옆지기에게 말했다.

만약 내 프로그램이 그들로부터 투자를 받으면

나는 5년만 경영을 할 것이다.

그 다음은 30대의 젊고 유능한 글로벌 인재를 발굴해 그에게 전부 맡기고 나는 물러난다.

그렇게 하세요.

내 몸의 에너지가 다 빠져버렸다.


이번에 신경외과와 내과의사가 나를 진료하면서 의아해 했다.

119에 실려오는 사람들 99%가 재활치료를 받는데,

이틀 만에 퇴원을 하는 걸 보면,

백그라운드가 어마어마한 분이 돕고 있는 모양입니다.

있습니다!


과로

수면부족

스트레스

가 나를 무너뜨렸다면,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내 의지와 채식이었다.

내과의사는 나에게

어떻게 지금까지 참으셨어요?

라고 물으며,

혹시 이명이 고혈압과 관계가 있는지 진료를 한 번 받아보십시오.

그러면서

정말 의지가 대단한 분이십니다,

라고 했다.

예, 깡철입니다!

혈압약은 한 달만에 끊었다.

정상으로 돌아왔다.


내 스트레스의 역사는 제법 깊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싸우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어느 날부터,

내 오른쪽 귓속에는 전투비행장이 하나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런 어느 날부터,

24시간 전투기들이 뜨고 내리기 시작했다.

잠이 달아나기 시작했고, 불면증이 찾아왔다.

이명은,

내 의지가 해결할 수 없는 거한 벽이었다.

나는 그 거한 비행장을,

 어느 해부터 이해하기 시작했고, 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물리치지 못하면 끌어안아라.

그래 너는 내

친구이고, 운명이다.

그리고 전투비행장과 쌍벽을 이루는 가위눌림.

밤마다 나는 한 번도 좋고 두 번, 재수가 없는 날은 세번, 네번씩

까마득한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곤 했다.

떨어질 때의 내 정신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렇게 떨어질 때마다 나는 하느님, 부처님, 날 좀 살래주소!

시키는 대로 할 테니 날 좀 살려주소,

하고 손과 발을 싹싹 빌면서 매달렸다.


고백 하나,

내가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사실이다.

엉터리 교수들을 만나면 왼쪽뺨 오른쪽뺨을 내 마음 대로

후릴 수 있는 것도 광적인 독서 덕분이다.

초등학교 때 이미 세계문학을 통독했고,

중학교 때는 일본문학을 접수를 했다.

그리고 중학교 그 때부터 나는 잠을 잃어버렸다.

자면, 죽으니까,

잘 수가 없었다.

그 전투비행장과 가위눌림이라는 공포가 두려워

나는 자지 않고 올빼미가 되어 책을 읽으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그 망할 가위눌림이 40 중반의 어느 날,

나로부터 영원히 사라져 떠나갔다.

망할, 개새끼!

그 비행장 덕분에,

나는 청각장애 6급이다.

그래서 얻은 것이 있다면, 말도 못하게 예민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남이 그리지 못하는 설계도를 나는 그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남들이 밝은 낮을 보면,

나는 어두운 밤의 세계를 본다.

내가 보는 세계는, 

그리고 그 깊이와 넓이가 깊고 넓다.

어젯밤 대학로에서 우리 두 사람은 추위를 끌어안은 채 우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무거운 짐 하나를 잠시나마 벗어던지기 위해 일탈의 시간을 가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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