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와 나
동해, 그러니까 부산에서 고성까지 동해에는 동해별신굿이라는 게 있다. 바다에 의존하는 선주와 선장 그리고 선원들의 무사귀항과 풍어를 위해 굿을 하곤 한다. 어느 해는 별신굿을 취재하기 위해 일본의 NHK와 영국의 BBC방송국에서 와 일주일 동안 촬영을 하곤 했다. 헬기까지 동원이 되었다. 민속학을 전공한 교수와 기자들도 내려와 자료를 모으고 기사를 내보내며 별신굿을 무형문화재로 남기고 홍보하는데 기여를 하곤 했다. 지금도 동해에서 별신굿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기억 저 너머의 정희를 다시 만난 것은 며칠 전 인터넷 기사였다. 흑백사진의 그는 한 눈에 정희였다. 아, 서울에 살고 있었구나. 기사를 보았다. 정희는 한예종에서 20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강사든 겸임이든 출세했네. 뿌듯했다. 그런데 본질은 그게 아니었다.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살고 있었다.
장구에 미친 정희는 그러나 학력은 별무다. 우리 집에 세 들어 살 때에도 정희는 글을 몰랐다. 그래서 어느 해 대구병무청에 가 여권을 발급하는 그 일을 내가 도와준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어 번씩 식구들이 방에 모여앉아 악기를 연습하고 그리고 소리를 연습하는 날이 있다. 그럴 때마다 혹시 우리 집 식구에게 마음에 짐이 될까싶어 신경을 쓰며 눈치를 보곤 했다. 그때마다 내가 나서서 차단을 했다.
“아주머니, 아무 염려 말고 연습을 하세요.”
“네, 고마워요.”
정희어머니는 나에게 존칭을 썼다. 맏이인 정희는 나와 열 살 정도 차이가 났다. 형님이었고 동생이었다. 정희가 고향에서 기댈 수 있는 언덕이기도 했을 것이다. 자기들 세계를 가장 많이 이해를 해주는 고향사람이다, 라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강사직에서 해고가 된 모양이다. 석사학위 이상이어야 강사와 겸임교수를 할 수 있다고 하면 학력 별무인 정희는 그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 장구밖에 모르는 정희가 무슨 수로 석사학위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정희가 교육을 충실히 받았으면 장구를 그렇게 신명나게 잘 치지는 못 했을 것이다. 쉬는 날 마루에 불러내어 장구를 한 번 처보라고 부탁을 하면 정희는 신기 들린 사람 모양 장구를 가지고 놀았다. 장구가 정희였고, 정희가 장구였다. 두 벼랑 끝에서 괴로운 나날을 보냈겠구나. 학위와 생활. 그 끝에 극단적 선택을 한 모양이다. 북한산이면 내 생활 무대가 아닌가.
정희 아버지도 여러모로 예인이었다. 트위스트 김 배우를 닮은 정희 아버지는 오토바이를 즐겨 탔다. 정희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리고 정희도 몸이 다 날씬했다. 담배를 즐겨 피운 정희 아버지는 아마 폐병으로 돌아갔지 싶다. 홀로 남은 어머니는 부산에 살고 있는 큰아버지와 큰 어머니, 그리고 고모 몇 분과 정희네가 모여 별신굿을 하곤 했다.
고향에 살 때 1년에 많으면 다섯 번 적으면 두 번 정도 있는 굿으로 생계를 이어가다 보니 늘 생활이 궁핍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은 정희 어머니는 굿을 하고 난 다음이면 박카스부터 샀다. 박카스를 몇 통씩 사놓곤 마셨다. 내가 옆에 있으면 가끔씩 박카스를 주었지만 나는 사양했다. 그 때부터 나는 식에 대해 남다른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박카스를 마시면 마실 때만 잠시 정신이 맑아진다. 그런데 나쁜 게 하나 있다. 중독이다.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계속 마셔야 한다. 고로 처음부터 안 마셔야 한다. 라는 게 내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정희네는 2남 3녀였다. 아들 둘에 딸이 셋이었다. 전부 초등학교 중퇴였다. 공부 대신 악기와 소리를 익혔다. 정희는 장구를 기가 막히게 쳤다. 한 때 김덕수 사물놀이 팀에서 장구를 친 일도 있었다.
그 해 가을
어느 해 가을이었을 것이다. 정희네 남매들이 마루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희 밑에 남동생은 굿에 관심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 그런 굿판에서 꽹과리를 치는 게 솔직히 창피했을 것이다. 다른 기술을 배워 빨리 독립을 해야지 하는 마음이 꿀떡이었을 것이다. 정희 여동생은 소리를 배우고 있었는데, 소리보다는 연애 쪽에 관심이 더 많았다.
“난 안 해!”
정희가 아마 악기를 연습하자고 한 모양이었다. 그 말끝에 정희 남동생이 내뱉은 말이었다. 남동생은 꽹과리나 북을 쳤을 것이다.
‘나도 안 해!“
여동생이 호응을 했다. 빨리 집을 나가 자기 또래들과 읍에 나가 남자애들을 만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내가 남동생을 불렀다.
“태완아.”
“네.”
“치기 실나?”
“네.”
“이 일을 안 하면 그럼 머하노?”
“자동차기술 배우고 싶은데요.”
‘운전?“
“네.”
“자동차 기술도 좋다. 하지만 지금까지 배운 꽹과리는 누가 치노?”
“…”
“내 말 잘 들어라. 지금은 굿이 싫고 꽹과리가 싫겠지만 머지않아 대접을 받는 날이 온다. 너거는 무당이 아니라 별신굿을 선보이는 무예인들이다. 이 기술을 배워놓으면 얼마 안 가 해외에 나가 살다시피 할 거다. 임마, 단디 배워놓아라. 대접 받는 날이 온다.”
그 날 그 이야기가 그들과의 끝이었다. 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가족 전체가 해외공연을 자주 다녔다고 했다. 그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는 정희네는 내 생활에서 사라졌다. 30여 년 후에 다시 만난 정희. 조금은 충격이었다. 며칠 전 그 기사를 보고 나서야 정희와 내가 30년이 넘는 세월을 서울에서 비껴 살았다는 것을 알았다. 조금 아쉬운 건 그 때 내가 그들에게 그 다음 단계를 설명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별신굿 기능 전수 조교가 되는 게 아니라, 가족 모두가 모여 사물놀이에 집중을 했어야 했다. 그렇게 되었으면 정희는 한예종이 아닌 새로운 사물놀이 팀의 수장이 되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각광을 받는 사물놀이 팀이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극단적 선택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1+1=2
정희는 그 공식밖에 몰랐다. 고향을 떠나올 때 미리 미래의 청사진을 그렸어야 했다. 그래, 나는 죽어도 사물놀이다. 김덕수 사물놀이 패를 나았을 때도 그 생각을 굳혔어야 했다. 그 때 그런 창조적 상상력이 나왔으면 정희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 모두 다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또 있다. 서울에서 살면서 한 번이라도 나와 만났으면, 그래서 그 옛날 고향에서처럼 형님요,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운명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놈, 정희야, 한예종이면 6호선이고, 1호선과 겹치는 지역이라 나하고 한 번은 만났을 텐데 그렇게 비껴가면서 지냈나? 그래서 지난 일은 또 후회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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