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풀쩍 뛰어넘는 길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1818년 독일 트리에 시에서 출생하여 1883년 영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1883년 3월 17일, 몇 명만 참석한 마르크스의 초라한 장례식. 그 자리에서 그의 동료이자 후원자였던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류는 한 영혼을 잃었다”
우리 인류의 삶을 바꾸기 위해 일생을 바친 마르크스의 삶은 고난과 가난의 연속이었다. 그의 성스러운 얼굴을 보자. 얼굴 어디에도 자식을 굶어죽게 할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여섯 명의 자식 중 셋이 굶어죽는다.
마르크스는 본과 베를린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다. 그리고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지만 극단적인 헤겔 좌파적 성향이 강했던 그는 교수직을 얻지 못한다. 후에 라인신문에 기자로 취직해서 1842년 편집장이 된다. 그러나 그의 비판적인 기사로 신문사가 폐간되고 얼마 후 망명길에 오른다.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추방을 당한다. 유럽에서의 유랑생활 끝에 영국에 도착한 그는 대영박물관도서관에 둥지를 턴다. 그곳 도서관에서 그는 필생의 역작인 자본을 집필한다. 그 때 프랑스에서 친분을 맺은 바르멘의 직물주 공장 주인의 아들인 엥겔스의 물질적 후원이 없었다면 그의 연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평생 자유롭지 못했다. 무수히 많은 적들 속에 갇혀 지냈다. 탄압과 감시와 적의가 늘 그를 따라다녔다. 그의 일생은 투쟁이었다. 그는 거짓과 탐욕과 위선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적들이 많았던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일생 두 사람을 좋아했다고 한다. 고대 로마에서 노예제도에 대항하여 싸웠던 노예 출신의 전사 스파르타쿠스와 지동설을 밝힌 케플러. 그들의 혁명적 삶을 좋아했던 것이었다. 그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보면 알 수 있다.
1. 행복은 투쟁하는 것
2. 불행은 굴복하는 것
3. 가장 혐오하는 것은 노예근성
4. 가장 좋아하는 좌우명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
마르크스는 우리 인간의 삶을 바꾸려고 노력을 한 철학자이자 혁명가였다. 모든 철학자들이 이 세상을 해석했다면 마르크스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일생을 보냈다.
자본은 어떤 책인가?
인내와 끈기와 집중을 요구하는 책이다.
이 책은 그럼 어떤 사람들이 읽을까.
1. 경제학 교수들이 주로(의외로 잘 안 읽을지도 모른다)읽을 것이다
2. 경제와 정치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 드문드문 읽을 것이다
3. 우리 사회의 구조를 바꾸고 싶어 하는 피가 뜨거운 자들이 읽을 것이다
4. 인문학에 목이 마른, 팔자가 사나운 자들이 읽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부류는 몇 퍼센트를 차지할까? 1%, 2%, 3%. 몇 달 전, 김용옥 교수가 봉은사에서 신도들을 상대로 강의를 하다 천안함 사태에 대해 입을 열었었다.
“나는 0,00001%도 안 믿는다.”
그 수치와 어쩌면 맞먹을지 모른다. 그만큼 재미가 0,0001%도 없는 책이다. 1, 2, 3, 4번의 부류들이나 이 책을 붙잡고 씨름을 하지 팔자가 좋고 신수가 훤한 위인들은 자본 같은 책은 잡지 않는다. 자본이 가지고 있는 용량이 너무 넓고 깊기 때문이다. 기가바이트의 세계를 메가바이트가 해석하기에는 여러모로 역 부족이다.
나는 두 말 없이 3, 4번이다. 나는 진실로 우리 사회가, 아니 이 세계가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아니다. 제 3의 주의가 나타나야 한다. 그 길을 지금 궁구하고 있다.
며칠 전 밤, 자리에 누운 우리는 창밖의 달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요즘 내가 코를 박고 있는 자본에 대해 말했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쓴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 경제의 민주주의였다. 마르크스의 정신적 지주인 헤겔이 정치의 민주주의를 썼다면 마르크스는 경제의 민주주의를 썼다. (마르크스의 철학은 헤겔 철학에 힘입은 바 크다. 헤겔과 마르크스의 닮은점과 다른점은 뭘까? 헤겔 철학의 핵심은 변증법이다. 헤겔은 이 세계의 동인은 정신이라고 보았고 마르크스는 물질로 보았다.) 하지만 세계는 아직도 경제의 민주주의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 대안이 나와야 한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그 대안. 답이 있어요?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정신도 물질도 아닌 제 3의 대안이. 나는 생각한다. 다시 인문학으로 돌아가 의식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 인간을 말라 비틀어지게 만들고 있는 탐욕과 무지를 이제 내려놓아야 한다.
1. 세계인의 의식혁명
2. 나의 부는 우리의 것이다
3. 한국의 부는 아시아의 것이다
4. 이 세계의 부는 이 세계인의 것이다
여기에 도장을 찍어야 한다. 오는 11월 서울에서 G20이 열리면 우리 국민과 세계인들의 살림살이가 좀 나아질까? 아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연결하는 것도, 고환율도 아니다. 문제는 세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의식혁명과 정치와 경제의 민주주의가 전주비빔밥처럼 섞여야 한다. 그리고 세계는 하나다는 이론을 뒤섞으면 우리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이 나온다.
마르크스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의 몰락을 말하고 있다. 돌아보면 그렇다. 100년 전과 100년 후 오늘 우리의 삶은 달라진 게 없다. 전체적인 틀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우리 인간들이 풀어야 할 주제는 한결같다.
1. 우리 인간의 삶의 존재 조건은 무엇인가
2. 우리 인간의 삶을 질식시키며 억압하는 것은 무엇인가
3. 우리 인간이 붙잡아야 할 자유를 잡기 위해서 우리가 잡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한번 보자. 자본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넘어온 지금의 세계를. 이미 사회주의는 몰락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패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지난 97,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서 자본주의의가 종착역에 왔음을 보았다.
자본주의도 답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최대 문제점은 그 간격을 메울 수 없는 양극화이다. 가면 갈수록 부의 편중은 심해지고 그 골은 깊어가고 있다. 한 사람의 부를 위해 만인이 가난에 목숨을 걸어야 하고, 가난한 만인들은 한 사람의 부를 위해 고통스러운 삶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 난제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그 골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마르크스가 내놓은 답은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쓴다
다시 없이 좋은 말이다. 여기 공동 뒤주가 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뒤주에 쌀을 한 섬 넣을 수 있을 것이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한 홉을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를 채우는 양은 어슷비슷하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이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그 맛에 살고,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은 이웃의 고마움을 느끼며 살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정글의 법칙만이 존재하고 있다. 공동선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성장만이 우리 인간의 삶을 갉아먹고 있다.
세계인의 숨통을 조이고 있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부의 편중과 가난의 악습에는 자본, 생산, 노동, 잉여가치론, 금융 등이 늘 마찰을 일으킨다. 신자유주의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정점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몰락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마르크스가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너무 당연하다. 21세기 이후 우리 인류가 영원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신과 물질은 둘이 아닌 하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을 끝없이 타락의 나락으로 이끄는 두 가지
1. 탐욕
2. 무지
를 이제 내려놓아야 한다. 그리고 소유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까지 특정국가와 특정 세력들이 독점해온 소유를 이제는 세계가 함께 공유해야 한다. 답은 그것뿐이다. 이 세계와 세계인은 하나다, 라는 사실을 붙잡아야 한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공간과 자원과 능력은 둘이 아닌 하나인 것이다. 하나에서 여러 개로 갈라졌을 뿐이다. 생각해보자.
1. 이 세계의 자원은 이 세계의 것이다
2. 이 세계의 부는 이 세계인의 것이다
3. 이건희의 부는 우리 국민의 것이다
4. 소르소와 워런 버핏의 부는 세계인의 것이다.
여기에 세계인이 도장을 찍어야 한다. 사회주의도 자본주의도 풀지 못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다. 너무 간단하다. 이 간단한 이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소유는 탐욕과 무지를 낳았다. 탐욕과 무지 때문에 잃어버린 우리 인간의 본성을 되찾지 못하면 우리 인류에게 미래는 없다.
마르크스의 자본이 주는 메시지는 오늘도 살아 있다. 자본을 뛰어넘을 수 있는 대안은 경제와 성장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인간지상주의뿐이다. 우리는 다시 한번 약속해야 한다.
이 세계는 하나다
나는 네이고 네는 우리다
동양은 서양이다
중동은 미국이다
세계의 종교는 하나다
이 세계인은 하나다
고로 세계인은 이제 어깨동무를 해야 한다
뒷이야기-불과 3,40년 전만 해도, 길을 가다 목이 마르면 물을 얻어 마실 수 있었다. 배가 고프면 밥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물을 한잔 얻어 마시는 사람과 주는 사람 모두 당연하게 생각했다. 언 몸으로 밥 동냥을 온 사람에게 밥을 주면서 당연하게 생각하곤 했다. 지금도 그게 가능할까. 이제는 길을 가다 목이 마르면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편의점에 들어가 물을 사 마신다. 그리고 식당에서 밥을 사 먹는다. 그 옛날의 인심은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 생각해보자. 우리 인간들의 본향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똬리를 튼 채 앉아 있는 무시무시한 탐욕과 무지의 괴물을. 그 자화상이 바로 우리인 것이다. 우리 인류가 풀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이제 이 땅을 갈아엎어야 한다. 탐욕과 무지를 갈아엎을 의식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우리와 세계가 하나가 되는 인간지상주의를 건설해야 한다.20101026도노강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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